즉비(卽非)의 논리

즉비(卽非)의 논리:


즉비(卽非)의 논리

이찬수
Ⅰ. 즉비의 논리


“즉비의 논리”(卽非の論理)는 일본의 불교철학자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1)가 ������금강경������에서 힌트를 얻어 창안해낸 선(禪)의 논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스즈키는 ������금강경������의 다음과 같은 구절들, 즉 “반야바라밀은 곧(卽) 반야바라밀이 아니다(非).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이라고 불린다.”(般若波羅密卽非般若波羅密是名般若波羅密), “일체법은 곧(卽) 일체법이 아니다(非). 그러므로 일체법이라고 불린다.”(一切法者卽非一切法是故名一切法) 등에 나오는 “즉비”라는 표현 속에서 선불교적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보았다. 산은 산이 아님(非)으로써만 산일 수 있고(卽), 물은 물이 아님으로써만(非) 물일 수 있듯이(卽), 일체 사물의 대긍정(卽)의 세계인 선(禪)은 부정과 차별로서의 “비”(非)를 전적으로 포함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단순히 양적인 포함이 아니라, “비”인 그대로 “즉”이라는 말이다. 긍정을 뜻하는 “즉”과 부정을 뜻하는 “비”는 단순한 대립의 차원이 아니라, 대립하기에(非) 도리어 대립하는 그대로 동일하다고(卽) 말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고 방식이야말로 불교철학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것이 스즈키의 지론이다. 그는 이런 예를 든다.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 ‘마음 곧 부처’(卽心卽佛)라는 것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는 것과 필시 동일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즉(卽)은 긍정을 비(非)는 무엇보다 부정을 나타내므로, 양자간에 어떠한 관련성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선의 논리상 그 특징은 ‘긍정 즉 부정’, ‘부정 즉 긍정’이 되는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즉비의 논리”인 것이다.2)

한 마디로 ‘대립’(非)이 그대로 ‘동일’(卽), 차별이 그대로 일치라는 말이다. ‘즉’(卽)은 문자적인 의미에서 형식논리적 인과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에는 “있는 그대로”의 뜻이 들어있다. 또 ‘즉’은, 스즈키에 의하면, “‘직접적으로’, ‘매개를 용납하지 않는’, ‘눈으로 본대로 귀로 들은대로’를 뜻하는 것으로, 순간적, 직접적, 지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즉심시불(卽心是佛),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고 말할 때 ‘즉’은 마음과 부처 사이에서 발견되는 논리적 인과 관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자기 동일성을 직접 깨닫는다(直覺)는 체험적인 것”3)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 ‘즉’은 부정으로서의 ‘비’(非)와 대립하고 있는 또다른 것이 아니다. 가령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할 때는 마음과 부처는 상대적인 차원에 있는 것이다. 이 상대적인 차원을 부정하는 말이 ‘비심비불’이다. 그러나 이 부정은 단순한 부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라는 절대 긍정의 사실이다. 부정이라는 ‘수단’을 통해 긍정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어떤 하나가 매개물을 통하여 다른 하나를 보는 식의 경험이 아니다. 본래 서로 다르던 것이 나중에 비로소 합일된다는 뜻도 아니다. 부정이 그대로 긍정, 다시 말해 “비심비불(非心非佛)이 즉심즉불(卽心卽佛), 즉심즉불이 비심비불이라는 것이다.”4) 그래서 “즉 그 자체로 비”이다. 진정한 의미의 절대‧긍정은 상대‧부정과 대립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부정 그대로 긍정인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반야심경)의 ‘즉’(卽)이야말로 색(色)과 공(空)이라는 대립의 세계(非)가 그대로 동일성의 세계임을 말해주는 핵심 선어(禪語)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스즈키는 대립과 차별과 부정(非)을 그 자체로 포함하는 대긍정(卽)의 세계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과연 ‘논리적으로’ 가능한 말일까?
물론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구를 지배해온 형식 논리로 보자면 “부정이 부정인 그대로 긍정”이라는 것, “-이기도 하고 ‘동시에’ -아니기도 한 것”은 불가능하다. 전통적인 서구의 논리학은 “A는 A이다”(同一律)에 근거해 있는 ‘존재의 논리’이다. 서구의 논리학에서는 기본적으로 A는 A일 뿐이지 결코 非A가 될 수 없는 A이다(矛盾律). 따라서 여기서는 A이면서 동시에 非A인 것, A도 아니고 非A도 아닌 그 ‘중간’이란 없다(排中律). 이러한 논리에서 A는 언제나 非A와 불연속적이다. 왜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A를 A되게 해주는 것을 무(無)가 아닌 유(有), 즉 존재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A를 A되게 해주는 것이 무(無)가 아니고 유(有)인 한, A와 非A는 대립적이다.
변증법을 깊이 있게 다룬 헤겔도 결국 이 존재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했다.5) 그가 말하는 이데(Idee)가 즉자(卽自, an sich), 대자(對自, für sich) 즉자대자(卽自對自, an und für sich)로 변증법적으로 지양(止揚, aufgehoben)된다 해도, 모순률까지는 극복하지만, 배중률은 극복하지 못한다. 물론 그에게도 실재의 즉자적 ‘긍정’과 대자적 ‘부정’은 배타적 대립의 상태가 아니다. 모든 유한한 현상은 이미 자체 안에 자기부정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인간은 이런 대자적 상태에서 자기 특유의 존재성을 의식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자기부정이야말로 자기긍정의 기초이다. 이런 식으로 헤겔은 부정을 통한 긍정을 보면서, 일반적인 형식논리, 특히 모순률을 넘어선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즉자적 긍정과 대자적 부정이라는 자기 모순을 극복, 지양하고자 부정의 부정을 통한 ‘자기복귀’까지 말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부정은 과연 진정한 의미의 부정인가? 정립과 반정립이라는 대립의 상태를 유화(宥和)시키던 피히테와 셸링의 변증법을 조금 더 심화한데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헤겔에게서조차 부정은 철저한 부정이 되지 못하고 배타적 대립성의 완화 정도에 그치고 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왜일까? 존재의 자기부정을 말할 때 조차도 그 부정은 철저한 ‘비존재’가 되지 못하고 결국 ‘존재’로 남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존재로 남는 한, 헤겔이 말하는 ‘타자적 존재’의 ‘자기 복귀’란 결국 완전한 것이 못된다. 그러기에 헤겔에게서 A이면서 동시에 완전히 非A인 것, A도 아니고 非A도 아닌 것은 설자리가 없다. A와 非A의 ‘중간’(中)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排).6) 서양 논리학에서는 이 ‘중간’을 보지 못하는 것을 당연시해왔으며, 헤겔에 이르러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스즈키 다이세츠는 이러한 사실을 문제삼으며 동양적 논리, 선적 논리, 존재와 비존재를 모두 포괄하는 논리, 대극합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논리를 추구한다. 그것을 “즉비의 논리”라 부르는 것이다.
즉비의 논리라 해서 동일률을 부정하는 논리는 아니다. 도리어 “A는 A”임을 밝히는 동일률을 그 근저에서부터 긍정하고자 하는 논리이다. 어떤 논리든 A를 A로 긍정할 수 있는 논리, 즉 동일률(同一律) 혹은 자동률(自同律)을 원리로 한다.7) 따라서 서양의 논리에서나 즉비의 논리에서나 “A는 분명히 A이다”. 그런데 즉비의 논리에서는 주어로서의 A와 술어로서의 A 사이에서 하나를 더 본다. A의 부정, 즉 非A이다. A가 참으로 A인(卽) 것은 A가 A가 아니기(非) 때문이라는 것이다. A가 A 아닌 이곳에서 A는 참으로 A가 된다. A→非A→A라는 말이다.
화살표(→)로 표시했지만, 사실상 그것은 어떤 단계가 아니다. A가 非A와 대립하는(非) 그대로(卽) A라는 것이다. “비”라는 대립성 안에서 그 대립성 그대로 “즉”이라는 동일성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A=非A=A이다. 그런 점에서 스즈키의 “즉비의 논리”는 “A는 A이다”를 긍정하는 동일률이되, ‘즉비적 동일률’, 달리 말하면 “즉비적 자기동일”(卽非的自己同一)이다.8) 즉비적 자기동일의 원리에서는 ‘대립’이 ‘동일’로 수평적인 이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대립이 그대로 동일이라는 것이다. 대립이 그대로 동일이기 위해서는 그 대립을 구성하고 있는 부정으로서의 ‘아니다’(非)가 단순한 부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절대긍정(卽)으로 화해야 한다. ‘비’가 그대로 ‘즉’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즈키는 이렇게 말한다.

‘비’란 근본의 모순을 말한다. ‘그렇다’와 ‘그렇지 않다’의 대립을 말한다. 즉, 생사의 세계, 춥고 더운 세계, 절대로 상용(相溶)하지 못하는 항쟁을 말한다. ‘즉’이란 이 절대적으로 상용하지 못하는 것이 그대로 동일성이라는 장면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동일성이라는 것―‘즉’―이 별도로 있고 그것과 상용하지 않는 것―‘비’―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비’가 그대로 ‘즉’, 즉 절대로 서로 ‘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즉’인 것이다. ‘즉’과 ‘비’는 그대로 동일한 것이다. 한편으로부터 다른 편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동한다고 한다면, ‘즉’도 ‘비’도 없어지고 ‘즉비’의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9)

‘비’가 ‘즉’으로 수평적인 장소 이동을 함으로써 ‘비’를 구성하고 있는 대립적 현실을 무시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대립을 그 대립으로 남겨두면서 동일성을 확보하는 논리가 ‘즉비의 논리’라는 것이다.10) 실천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대립(非)의 근저로부터 그 대립의 세계를 구성하는 고유의 자아란 없다는 사실이 열리면서, 대립적 현실 그대로 용납되는(卽)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영혼의 내적이고 심원한 고민의 한 복판에서 도대체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 머리 위로 한 줄기 빛이 비쳐오는 것과 같다.11) “A는 非A이다” 혹은 “A는 B이다”를 볼 수 없게 만드는 인간적 오성의 상황을 타파하는 것이다. 그 때에야 우리는 결국 “A는 非A”임을 깨닫고, 일상적인 의미의 논리란 일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평상시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하게 보이던 것도 도리어 사물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12)
이런 식으로 ‘즉비의 논리’는 단순한 이론이나 형식논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논리라는 말을 쓰지만, 추상적 ‘형식’이 아니라 실재의 ‘작용’ 그 자체이다. ‘체험’을 논리화한 것이기 때문이다.13) 이노우에(井上洋治, 1927~)도 말하듯이, 가령 한 그루의 나무를 관찰한다고 할 때, 그 나무‘에 대한 개념적 인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체험하는 행위적 인식’을 가지는 것이다.14) “관찰자 자신이 바로 그 나무가 되어서 그것이 내면적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자신이 느끼는 것”과 같다. 그래서 관찰자와 나무의 “형식상의 통일이 아니라 작용상의 통일”이라 말한다.15) 스즈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A는 A이다. A는 非A가 아니다. 이런 형식을 어떻게 일상생활에 적용시키는가? 아침에 일어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인사한다. 이것이 긍정인가, 부정인가. A도 非A도 아닌, 절대긍정인가. 무엇이 초월성의 명제인가. 이 외에 어떤 논리가 있는가.16)

이것이 선(禪의) 시각이다. 바로 우리의 일상적 삶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따라서 탁월하게 실제적이다. 여기에는 추상이나 변증법이 지닌 번잡함이 없다.17) 아침에 일어나서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하며 인사하는 것과 같다. 아침 인사를 하는 일은 어떤 사태의 단순한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모순률이냐 배중률이냐 하는 추상적 형식 안에 담아둘 수 없는 일이다. 참으로 초월적인 것이다. 그러기에 일방적 틀 안에 갇히지 않는(非), 우리의 일상적 삶 자체가 되는 것이다(卽). 아침 인사는 인사하는 사람과 인사받는 사람 간의 추상적, 형식적 통일이 아니라, 행위상의, 작용상의 통일이다. 이와 같은 주체와 대상 간의 작용상의 통일이 견성이고 깨달음이다.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1870~1945)의 “장소적 논리”가 자각의 논리, 깨달음의 논리이듯이, 즉비의 논리 역시 영성적 자각의 논리이고, 생사의 문제가 걸린 논리이다.18) “교착 상태로부터 확 뚫린 거침없는(融通無礙) 마음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다.”19)
이곳에서 모순률은 극복된다. A와 非A가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개념이 아니기에 그 중간(中)이란 것도 따로 없으며, 따라서 애당초 배중률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中)을 배타하는 ‘배중률’이 아니라, ‘중’을 용납하는 ‘용중률’(容中律)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A와 非A 사이에서 ‘중’을 볼 수 있는 이유는 즉비의 논리가 ‘유’(존재)에서 시작하는 ‘유의 논리’가 아니라 ‘무’에서 시작하는 ‘무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일체의 근저를 ‘무’의 차원에서 보기에 대립이나 부정(非)이 상대적인 대립이나 부정에 머물지 않고, 대립이나 부정인 그대로 참으로 절대적인 ‘유’로서 긍정될 수(卽)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A는 非A이다. 그러므로 A는 A이다”가 성립되는 것이다. 일본 교토학파의 대표자격인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 1900~1990)도 이 즉비의 논리를 중시하면서, 불과 나무의 예를 통해 다음과 같은 식으로 푼다.

가령 “지금 불이 타고 있다”는 말은 “불을 태우는 불이란 없다”는 자기 부정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흔히 하는 말로 “불은 불을 태우지 않고 물은 물을 씻지 않으며 눈은 눈을 보지 않는다.” “불은 나무를 태움으로써 자신을 태우지 않고, 자신을 태우지 않음으로써 나무를 태운다.”20)

나무를 태우는 것으로 보이는 불의 실체성은 자신을 태우지 않는다는 불의 비연소성(非燃燒性) 위에서만 성립된다. 한 마디로 불의 자기동일성은 무자성(無自性)에서만 성립된다는, 달리 말해 불은 불이 아니라는 자기부동일(自己不同一)을 포함하는 곳에서만 ‘리얼한’ 불의 현실이 파악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동일적 동일’, ‘무자성적 자성’이야말로 “온갖 사물이 각각 자기 자신의 근본에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이 자신을 태우지 않기 때문에 불인 것, 버드나무가 녹색이 아니기 때문에 녹색인 것, 시간이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인 것이다. 말하자면, ‘즉비적(卽非的)’으로 하나로 성기(性起)하는 자기이다. 그것은 ‘자기’ 아닌 자기, 무아적 자기로서, 진실로 본래적인 자기이다.”21) 이런 식으로 불을 불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불의 자기동일성은 불 자체의 비연소성에 있다. “지금 불이 타고 있다”는 말은 “불은 자신을 태우지 않는다, 왜냐하면 불에 의해 태워질 불이란 없기 때문이다”는 말 위에서 성립된다. “이것이 불이다”라는 실체적 긍정은 “이것은 불이 아니다”라는 무아적 부정 속에서 성립된다. 그러므로 “불은 곧(卽) 불이 아니다(非), 그러므로 불이다”라는 즉비의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니시타니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대승불교의 맥락에서 볼 때 논리적 분석을 통해 도출되는 중심 원칙은 ‘유즉무’라는 비논리의 논리이다. ‘유즉무’란 오히려 ‘즉’에 서서, ‘즉’에서 유를 유로서 무를 무로서 본다는 의미이다.22)

‘즉’에서 유를 유로서, 무를 무로서 ‘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물론 유를 유로서 보는 것은 사람이다. ‘즉’을 ‘즉’되게 해주는 것은 ‘즉’의 언어적 개념이 아니라 사람, 즉 살아있는 ‘본래적 자기’로서의 진인(眞人)이다. 진인이 유를 유로서 보는 방식이 ‘즉’의 방식이라는 것이다.23) 스즈키가 “즉비의 논리는 인간의 행위에만 적용된다”고 말할 때의 그 인간적 행위에서만 즉비의 논리는 성립한다.24) 이러한 진인의 행위에서 ‘-이다’와 ‘-아니다’ ‘유와 무’, ‘색(色)과 공(空)’이라는 양 극단이 통일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이고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그러나 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그대로 “색즉비색(色卽非色), 공즉비공(空卽非空)”이다.25) “색은 곧 색이 아니기에 색”이고(色卽非色是故色), “공은 곧 공이 아니기에 공”이라는 말이다(空卽非空是故空). 범부의 집착적 색(色)이 부정(非)되는 여기에 색(色)과 비색(非色)의 ‘즉일’(卽一)이 있다.
일단은 부정이 긍정으로의 매개가 된다는 점에서 즉비의 논리도 일종의 ‘변증법’이다.26) 그러나 이 때의 부정매개로서의 긍정은 평면적이고 수평적인 이동이 아니다. 모순을 없앤 후의 단순 통일이 아니라, 모순을 살려두는 그대로 통일되는 것, 즉 A와 非A가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그대로 통일되는 것이다. 모순이 모순을 통해 없어지는 것이다. 니시다(西田幾多郞)가 말하는 “절대모순적 자기동일”(絶對矛盾的自己同一)도 같은 맥락이다.27) 이것이 진인이 사물을 보는 방식이다. 진인이 사물을 보는 방식에서, 즉비의 논리는 ‘자각의 논리’가 된다. 즉비의 논리는 대상 논리가 아니다. 보는 대상과 보는 행위는 같다. 가령 불성(性)을 본다지만(見), 사실상 보는 대상과 보는 행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보는 행위(見)가 그대로 보이는 대상(性)이다.28)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주체적 ‘노에시스’와 객체적 ‘노에마’는 즉일적(卽一的)이다.29) 비대상적, 전일적(全一的)이고 통일적인 ‘봄’(見)의 논리가 즉비의 논리이다.


Ⅱ. 회호적 관계

이 통일성은 대립적 현실을 무시함으로써가 아니라 대립 그대로 긍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래서 “즉 그대로 비”, “비 그대로 즉”인 것이다. 유와 무는 “즉비적인 일체”로서 성립한다. 마찬가지로 “역동적 세계 연관으로서의 현존재는 세계 연관과 즉비적으로 하나이다.”30) 이러한 ‘즉비의 논리’라는 용어와 방법은 쿄토학파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오고 있으며, 니시타니도 이 용어 자체를 남발하지는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이 논리를 이용한다.31) 또 “회호적 관계”라는 자신만의 용어를 구사하기도 한다. 특별히 다음에 제기하는 공간적 표상, 즉 하나의 벽을 사이로 해서 둘로 나뉘는 방의 모습은 ‘즉비’ 혹은 ‘회호’의 구체적인 예이다.32)
방A
a


b


W
방B 


위 그림에서처럼 하나의 벽(W)을 경계로 A와 B라는 두 방이 나뉘어질 때, 벽(W)은 두 방 모두에 불가결한 것이다. 이 때 벽면 a는 방 A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방 B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것은 B의 표현이면서 A에 속한다. 이것은 벽면 b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벽면 b는 현상적으로는 방 B의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B 속에서 A를 대표하는, B에 나타난 A의 표현이다. 니시타니는 이렇게 요약한다.

본질적으로 A에 속하는 것이 B 속으로 자신을 전달한다든가 투사한다든가 함으로써 현상(現象)할 때, 그것은 B 속에서 ‘A로서’ 현상하는 것이 아니라 B의 일부로서 현상한다. 바꾸어 말하면, A의 본체(體)가 B의 본체(體)로 자신을 전달할 때, 그것은 A의 형상(相)에 있어서가 아닌 B의 형상(相)에서 전달된다. A는 스스로를 B의 형상에서 B로 분여(分與, mitteilen)하고, B도 A로부터 그것을 B의 형상에서 분유(分有, teilhaben)한다. 그것이 B로의 자기전달이라고 하는 A의 작용(用)이다. B측에서 A로의 전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33)

벽면 b는 방 A의 표현일 뿐 아니라 방 A의 자기 전달이다. 벽면 b가 벽 W의 일부인 한, 벽면 b 없는 방 A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벽면 b는 방 B의 일부일 뿐 아니라 방 A의 일부이기도 하다. 일부 없는 전체란 존재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까지 염두에 두면 벽면 b는 벽면 b에만 머물지 않고 방 A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A는 A로서가 아닌 B로서 현상한다. A가 B로 자신을 내어줄 때는 언제나 이런 방식이다. A는 A가 아니기 때문에 B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A와 B에는 막힘이 없다(無礙). A는 A가 아니기 때문에(非) A일(卽) 뿐 아니라, A를 A로서 규정하는 그것만의 본질이란 따로 없기에 B 안에 B의 모습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방과 방, 벽과 방은 벽을 경계로 서로를 조건짓는다. 이러한 상호 조건 짓기를 니시타니는 “회호적(回互的) 관계” 혹은 “회호적 투사”라는 말로 표현한다. ‘회호’란 한자(漢字)상으로는 “서로 돌다” 혹은 “상호 순환”의 뜻을 지니지만, 니시타니는 그 순환을 소박한 이론이나 가능성만으로 보지 않고 철저한 현실성으로 파악한다. 상호 순환은 상호 조건짓기이고, 그 조건짓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상대 앞에서의 자기 무화가 요청된다. 자기가 무화함으로써만 상대가 자주적(自主的) 지위에 서게 된다. 이것은 여타의 모든 것에 적용된다. 니시타니는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회호적 상입’(回互的 相入)의 관계가 부르기도 한다. 이 회호적 관계 혹은 회호적 투사란 자율적 자기가 무자기적으로 일체의 다른 것 밑에 종속됨으로써 이루어지는, ‘모두 주인이며 모두 종인 관계’이다.34) 그는 이렇게 해설한다.
어떤 개체가 다른 모든 사물에 대해서 종의 지위에 서 있다는 사실은 그 개체가 다른 모든 사물의 근본에서 그 사물들 각각이 ‘유’가 되게 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한다는 뜻이다. 자신이 종의 위치에 섰을 때 다른 사물들 각각은 자주적 지위에 서게 된다. ‧‧‧ 예컨대 A가 B,C...모두에 대해서 그러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A 자신의 주인된 입장의 절대 부정이며, 그 독자성 또는 그 ‘유’의 절대 부정을 의미한다. 환언하면, A가 통상 생각되는 실체성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며, 소위 ‘무자성’(無自性)이라는 뜻이다. 그러한 ‘유’는 공과 하나인 ‘유’이며, ‘가’(假)의 성격을 갖는 유이다. 이러한 원리가 B, C... 등의 각각에 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면, A에 대해서 B, C...는 모두 종의 지위에 서며, A를 주인으로 옹립하게 된다. B, C...는 A를 있게 하는 계기가 된다.35)

따라서 “어떤 개체가 ‘있다’는 것, 즉 그 절대 자주성은 다른 모든 사물에 대한 종속성과 하나된 장에서만 성립한다. 즉, 다른 모든 사물의 ‘유’가 어디까지나 ‘유’ 그대로 공이 되는 공의 장에서만 성립한다. 그리고 또 그것은 한 개체의 자주성이 다른 모든 사물에 대한 종속성을 이룰 때 성립한다. 그 자주성은 다른 모든 사물을 있게 하는, 따라서 자신이 ‘유’이면서 공인 입장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다.”36) 세계에 있는 모든 사물은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저 연결되어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서로 주인이자 종인 ‘회호’(回互)의 체계로서, 회호적 상입의 관계로서 만나며 존재하고 있다. 그 관계에서 각각의 사물은 그 자신이 아니면서 그 자신이고, 그 자신이면서도 그 자신이 아니다. 그 자신이 아니기에 상호가역적(可逆的)이면서도 동시에 바로 그 자신이기에 불가역적(不可逆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37)
물론 이 때 ‘불가역’이란 ‘가역’을 전제로 한 불가역이다. 니시타니에 의하면, 이러한 이치가 존재의 본질을 이룬다. “모든 사물의 ‘유’는 본질적으로 회호적이다. 불가역적이면서도 가역적이다. 바로 그것이 ‘유’가 공과 하나된 ‘유’이며, 공의 장에서 ‘유’라는 의미이다.”38) 이런 회호적 관계에서 모든 사물은 각각 그 자신의 근본에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모든 사물의 근본에 선다.
물론 이러한 회호적 관계는 두 개의 사물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방을 둘로 나누었을 때는 물론 셋으로 나누거나 넷으로 나누어도 사태는 마찬가지로 진행된다.39) 세계 전체가 세계 전체로서 성립하는 장에도 이 회호적 관계가 적용되고 있다. 세계는 개체들의 회호적 관계를 하나로 포괄함으로써 세계로 성립되며, 이 “회호적 관계가 무한히 복잡한 한 전체로서의 세계 연관이라고 하는 것의 기본 형식을 이루는” 것이다.40) 회호적 관계는 즉비가 말하려는 역동적 삶의 세계를 생생하게 드러내준다. 즉비의 논리가 체험의 논리, 진인의 행위 방식이라고 할 때의 그 생생한 모습을 ‘회호적 관계’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화엄에서 말하는 상즉상입(相卽相入), 사사무애(事事無礙)의 다른 표현인 셈이다.



Ⅲ. 선문답

즉비의 논리, 회호적 관계를 통해 설명되는 이 세계, 특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 원천적인 측면을 니시타니는 “공의 장”(空の場)이라 부른다. 그에 의하면, “공의 장은 이 세상 모든 존재가 현성하는 곳이며, ‘리얼’하고 여실한 모습으로 각자 사물이 그 자체로서 현성하는 곳이다. 공의 장에서 우리들의 진정한 자성의 자각(진정한 자각성으로서 자성)과 그 여실한 모습이 나타난다.”41) 공의 장에서 “근원적 주체성”이 확립된다. 이 근원적 주체성 혹은 자기정체성(卽)은 절대적 자기 부정(非)에서만 가능하다. 자신의 절대적 자기 부정은 절대적으로 상대적인 관계에서 비롯된다. 절대적으로 상대적이기에 자기 자신은 절대적으로 부정된다. 니시타니는 절대부정과 절대긍정이 조금도 차이가 없이 동시에 성립하는 장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즉’(卽)의 입장을 요청한다. ‘즉’이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는 ������벽암록������(碧巖錄, 제68칙)에 나오는 유명한 공안을 거론하면서 이 ‘즉’의 생생함을 보여주고자 한다.

앙산 혜적(仰山 慧寂)이 삼성 혜연(三聖 慧然)에게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삼성이 대답했다. “혜적이오.”
“혜적이라고?” 앙산이 되물었다. “그것은 내 이름이 아닌가?”
그러자 삼성이 대답했다. “그럼 제 이름은 혜연이오.!”
앙산은 껄껄 웃어버렸다.42)

이것은 앙산과 삼성의 선적 물음과 대답, 이른바 선문답(禪問答)이다. 이 선문답은 묻는 사람과 대답하는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화의 일종이다. 일반적으로 대화는 지극히 상대적인 관계를 전제한다. 인간 관계에는 항상 상대가 있게 마련이다. 내가 주체일 수 있는 것도 절대적으로 너와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이다. 선문답은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고 체현한 대화이다. ‘나’와 ‘너’가 모두 이러한 상대적 관계 속에서 절대적인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이중적 조건을 충족한 선적(禪的) 대화이다. 우에다 시즈테루(上田閑照, 1926~)는 선문답에서 벌어지는 물음과 대답의 상대성과 말하고 듣는 주체의 절대성의 관계를 이렇게 제시한다.

(문답에서) 자기가 이야기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상대와의 관계를 자기가 주최하여, 상대와의 관계에서 자기가 ‘주’(主)가 되는 것이다. 이번에는 상대에게 양보하여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은 상대를 ‘주’(主)로 삼는 것이다. 즉, 역할의 교체라는 것은 ‘주’의 존재 방식을 교환하는 일의 하나이다. 대화의‧‧‧근본은 상대를 ‘주’로 삼는 존재 방식의 교환이다. 그리고 이 경우 중요한 것은 인간은 자기가 ‘주’일 때만 자기인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자기로부터 떠나 ‘주’를 상대에게 양보하는 존재방식에 있어서도 그러한 존재방식이 가능한 한 참으로 자기라고 하는 것이다.43)

대화는 정보 전달의 수단이기 보다는 주체의 교환이다. 자기의 존재 방식은 자기가 ‘종’이 되고 상대를 ‘주’로 삼는 데서 성립한다. 대화란 단순히 말마디만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방식을 규정해주는 선의 근본 입장을 대변해준다. “대화는 인간 존재 바로 그것이다.” 우에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 존재는 본래 대화적 존재이다. 따라서 대화는 인간 존재의 본래부터 요구되어 왔다. 참으로 대화할 수 있다는 것, 즉 인간 존재의 본래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기임과 동시에 자기를 떠난 자유로운 자기’이지 않으면 안된다. 역으로 대화는 인간을 본래 있는 방식으로 훈련하는 장이다.44)

이러한 인간 존재 방식으로서의 대화는 상대적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각각 절대주체가 되도록 해주는 이중적 조건을 충실히 반영한다. “나와 너가 철저하고도 절대적으로 절대라는 사실은 서로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이들 모두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45) 니시타니에 의하면 이것은 넌센스나 모순이 아니다. 상대가 철저하게 긍정되지 않으면 상대도 죽고, 따라서 자기도 죽는다. 같은 하늘 아래에 원천적인 적(敵)이란 있을 수 없다. 유효적절하게 이들은 공존한다. 그래서 “각 절대적인 것들이 동시에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른바 선문답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선적인 입장을 잘 제시해준다.
위의 선문답은 앙산이 삼성에게 이름을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니시타니는 벽암록의 저자인 원오(圜悟, 1062~1135)의 주석을 빌어 “누군가에게 이름을 묻는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넘겨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46) 원오가 주석하듯이,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물음으로써 앙산은 “이름과 존재를 동시에 훔친 것이다.” 이것은 앙산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앙산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타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래서 원오는 이렇게 주석한다: “앙산은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자신이 삼성을 꼭 붙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도둑을 붙잡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도둑은 형세를 역전시켜 앙산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훔쳤던 것이다.” 니시타니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삼성은 자신의 이름을 묻는 질문에 ‘혜적’이라고 대답했다. 사실상 혜적은 앙산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삼성은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실제로 자기 자신을 넘겨받은 것이었다. 말하자면, 앙산의 절대적 본성인 앙산 자신으로서의 앙산의 본성, 즉 어떠한 ‘너’(Thou)도 그 앞에 대립적으로 세워둘 수 없고, 다른 모든 것을 자기 자신 안에 받아들일 그것을 넘겨받은 것이다. 앙산의 방어를 피하고 뒤로부터 공격하면서 삼성은 앙산의 밑바닥을 잡아당기고 그 현존재를 빼앗아 그곳에 자기 자신을 세워둔 것이다.47)

앙산은 이렇게 자신을 빼앗기고는 “껄걸 웃어버렸다”. 호탕한 웃음으로 그는 다시 자신을 찾은 것이다. 이러한 문답은 보통의 일상사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선적(禪的)인 해석과 깊이를 열어 보여준다. 저마다 주체적이고 따라서 대립적으로 작용하는 듯한 일상의 모든 일들이 사실상 그 근원적인 차원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꿰뚫은 대화이다. 이 대화는 사물의 근본을 자각하고 그 위에 선 사람의 예를 여실히 보여준다. 사실상 원천적인 차원에서 보면 각 주체는 그 주체로 서 있기에 그 근저에서 빼앗길 것도 빼앗을 것도 없다. “삼성이 자신의 이름을 앙산의 이름(혜적)으로 대답할 때 삼성은 앙산이고 나(the I)는 너(the Thou)‘이다’. 그리고 너 역시 나‘이다’. 이것은 앙산의 입장에서도 전적으로 같다. 나는 더이상 보통의 나가 아니라 동시에 너(앙산)인 나(삼성)이다. 마찬가지로 너는 단순한 너가 아니라 동시에 나인 너이다. 그래서 나와 너는 전적으로 서로 속으로 융합되는 것이다.”48)
이것은 “자기도 없고, 타자도 없으며, 인격도 없고 비인격적 관계도 없는” 플로티누스의 절대 일자(the Oneness)나 쉘링의 절대 동일(the Absolute Identity)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너 관계”는 절대적 무차별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나-너 관계는 “사실상 나와 너의 실재를 포함하는 것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의 실재와 거기에 속한 절대 대립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만 나와 너는 단순한 나와 너가 아니다.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기에 둘 다 절대적으로 무차별적인 것이다. ‘나’라고 하는 이 절대 무차별은 나 자체에 속하고, 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으로 나는 참 나이고 너는 참 너이다. 이것이 진정한 나-너 관계이다.”49) 즉비의 논리도 “A는 A”임을 밝히는 절대 동일률 혹은 자동률을 기본 원리로 한다는 앞에서의 말은 이런 맥락에 있는 것이다.


Ⅳ. 공의 장

니시타니는 이러한 선문답에서 자신과 타자가 절대적으로 자신과 타자로 있는 공의 장을 보여주고자 한다. 서로 논쟁하는 ‘나’와 ‘너’는 진정한 주체로서의 나와 너이다. 이들은 서로 다르다. 여기서 나와 너 사이의 관계란 도대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한 무차별로서의 무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절대 대립으로서의 무관계, 모든 관계들이 전적으로 초월되는 차원에서의 한 관계항으로서의 무관계이다. 사실상 일상의 삶에서 나-너 만남의 실재는 오로지 그러한 절대적 관계와 그러한 절대적 대립이 존재하는 것이다.”50)
공의 장에서 나는 나로서의 중심을 지니고 너는 너로서의 중심을 지닌다. 공의 장은 각 개체의 중심을 확보해준다. 내가 나로서 보장되고, 사물이 그 자체로 드러난다. 그런 까닭에 일체 사물의 일상성이 보장되는 곳이다. 그래서 “자기는 곧(卽) 자기가 아니다(非). 그러므로 자기이다”라고 할 때 후자로서의 자기는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자기와 다르지 않다. 공의 장이란 큰 긍정의 장이다. 본래적인 자기, 절대 중심으로 보장해 주기에 종교적 장이다.
절대 중심이라 하지만, 자체적으로 폐쇄된 중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삼성이 스스로를 앙산의 이름으로 대답한 것은 그가 자신을 비워 앙산을 그 자리에 둔다는 뜻이다. 타자가 개체의 중심이 되고 각 실존이 타자 중심적인 곳에서 절대적인 조화가 이루어진다.”51) 서로가 서로의 중심이 됨으로써 저마다 자신의 중심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중심이란‧‧‧‘사물’이 자신을 정립하고 있는 곳이고 자신을 긍정하며 놓고 있는 곳이며, 사물이 그 위치(Position)에 있는 곳이다.”52) 사물이 자신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각 개체가 그 개체의 근본에서 그 자신으로 존재하며, 다른 모든 사물의 뿌리도 그 개체의 근본에 뻗쳐 있다는 뜻이다. “모든 사물이 어떤 개체의 근본에 있으며 그 개체를 있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53) 일체의 이기적 자기중심성을 거부하는 까닭에 세계의 모든 것과 자기동일적으로 하나가 된다. “공의 장에서 모든 것 자체가 ‘동시에’ 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로’, 그리고 자기동일적으로 성립한다.” 공의 장은 “어떤 사물이 본래 있는 그대로의 존재 방식”이다.54)
이것은 회호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니시타니에 의하면 이것이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이다.55) 여기서 종교적이란 “상대적인 의미에서 자-타(self-and-other)를 자-타로부터 절대적으로 끊어버리는 공 혹은 무아의 입장에 있다”는 뜻이다. 자신을 비워 타자를 자신의 자리에 둠으로써, 타자와의 관계에서 스스로도 존재하는 이것이 사랑이라는 뜻이며, 이것은 공의 장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렇게 사랑은 공의 장에서 이루어진다. 길희성의 표현대로 하면 “공은 사랑의 존재론적 개념이며, 사랑은 공의 인격적 언어이다.”56) 공과 사랑은 같다. ‘너’ 속으로 자신을 비우는 사랑 속에서 자신과 그 ‘너’를 얻는다. 이렇게 해서 나와 너는 모두 ‘중심’이 된다. 그것도 절대 조화 속의 절대 중심이다. 절대 중심인 까닭에 각각의 ‘유’는 서로 다른 일체 사물의 ‘유’에 의해 지탱되고 세워진다. 이런 식으로 공의 장에서는 만물이 모두 저마다 중심이다. 각각이 절대 중심이면서 이들 중심들은 서로 대립되지 않는다. 이것이 현존하는 ‘리얼한’ 세계의 모습이다.

어떠한 작은 개체라도 그것이 ‘존재하는’ 한, 하나의 절대 중심이며 일체의 중심에 있다. 그 모습이 그것의 ‘유’이며, 그 ‘리얼리티’이다. 그리고 ‘세계’란 그러한 ‘유’의 집합이나 다름없다. 즉, 그러한 존재 방식으로 있는 사물 일체가 하나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고 지금 보고 있는 ‘리얼한’ 세계란 그러한 것이다. 일체가 서로 모여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는 가능성, 또 각각의 ‘사물’이 그 자신 속에 자기 자신을 모으면서 스스로 ‘존재한다’는 존재 가능성은, 공의 장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57)

공의 장은 어디에도 주변이 없으며, 도처가 중심이다. 여러 중심을 지닌 테두리없는 원이다. 이러한 다중심성은 모두가 주인이면서 종인 관계, 즉 회호적 관계에서 보장된다. 회호적 관계에서 모든 사물이 저마다 중심으로 존재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모든 사물이 서로 타자를 있게 하는 ‘힘’, 요컨대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그 본원적인 ‘힘’은 저 회호적 관계에서 유래한다.”58) “모든 사물이 그 ‘유’에서 타자의 근본으로 들어가 그 자신이 아니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나 그 자신이라는 그러한 회호적 관계 자체는 모든 것을 하나로 집결시키는 ‘힘’이나 다름없다. 즉, 세계로 하여금 세계가 세계되게 하는 힘인 것이다.
공의 장은 힘의 장이다. 세계에 있는 어떠한 것 속에도 세계의 ‘힘’이 그 사물 자신의 ‘힘’으로 현성하고 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물이라도 존재하는 한, 그 있다는 현존 속에는 만물을 연결하는 회호적 관계의 그물이 쳐져 있다. 혹은 그 ‘있다’에서 세계가 ‘세계로서’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한 존재 방식이, 그 자체적인 존재 방식이고‧‧‧‘사물’ 자체의 모습인 것이다.”59) 그리고 이것이 니시타니적 의미에서의 “사랑”, 즉 나를 나로서 보장해주는 “절대적 무관계의 조화”이다.60) 또 나를 본원적인 나로서 보장해주기에 종교의 장인 것이다.


Ⅴ. 즉비와 회호의 종교다원적 함축성

이렇게 즉비의 논리, 회호적 관계에서는 일체 사물의 주인됨, 절대 중심을 본다. 모두가 저마다의 독특성을 지닌 주인이라는 말이다. 소재를 약간 바꾸어 이것을 오늘날 종교적 현실 안으로 가져오면, 무엇보다 다양한 종교들의 목표들 및 한 전통 안에 있는 개개인의 차별성까지 있는 그대로 긍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하나의 관점만이 참일 수는 없다. 모순되는 듯한 다양한 관점들이 모두 참일 수 있다. 모두가 절대 중심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참됨은 우열을 재는 ‘비교급’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동시에 모든 차이를 하나로 통일하는 태도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것들 모두에서 ‘최상급’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그 보는 주체도 ‘최상급’이 된다. “공의 장에서는 도처가 중심”이라는 니시타니의 표현은 바로 이런 입장을 대변한다. 모두를 ‘리얼하게’ 살릴 수 있는 입장을 견지할 때 이른바 ‘다원주의’(多元主義)도 성립된다. 모두에게서 절대 중심을 본다는 점에서 다원주의는 종교들의 차별성과 주체성을 긍정하는 이른바 ‘차별주의’여야 할 것이다. 종교들이 대화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차별, 즉 ‘다름’을 용납해야 한다. “타자들의 타자성을 진지하게 취급해야 하는 것이다.”61)
다름을 긍정하는 것이 오히려 진정한 다원주의의 근거가 된다. 특정 기준에 따라 종교들을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이다. 파니카(Raimundo Panikkar)도 종교들의 궁극적 체계란 특정 기준에 따라 비교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비교될 수 없다는 그러한 사실이 도리어 각 종교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잘 드러나도록 해준다고 본다.62) 종교간 차이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적극 받아들인다면, 차별적인 여러 종교 집단들이 경쟁적으로 공존하는 “시장 상황”(market situation, 피터 버거)은 오히려 종교들이 저마다 거듭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자 계기이다. 타종교가 자기 종교를 변혁시키는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마크 하임(S. Mark Heim)은 이렇게 말한다.

“다양성은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능한 한 많은 증거와 가치들을 포괄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똑같은 증거 앞에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투신을 하게 하고 다른 방향들을 발전시켜 나가게 한다는 사실을 삼가 받아들이도록 자극하고 도전하는 문화적 혁신 방식이다. 여러 시각들 사이의 토론과 논쟁은 서로서로에게 생명의 피(lifeblood) 바로 그것이 된다.”63)

종교적 목적을 다양하게 보는 것이 현실의 끊임없는 변화에 더욱 어울린다. 이처럼 종교가 여럿이라는 현상 보고에 머물지 않고서, 종교가 여럿이라는 사실 자체를 종교의 내용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여럿이라는 현상(plural)을 종교적 차원에서(religious) 보아야 한다(ism)는 뜻이다. 그럴 때에만 참으로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를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에서만 자신과 타자가 바로 그 자신과 타자가 된다. 모두가 “절대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종교 상황은 단순한 정적 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나와 너를 나와 너로서 살게 해주는 생명의 근원이며, 새로운 창조를 낳는, 창조의 원동력이다. 다양함, 다름을 받아들일 때에 내가 언제나 새롭게 살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종교 현상 자체에 종교적 깊이가 들어있으며, 이러한 사실을 종교의 핵심적 내용으로 받아들일 때 진정한 종교다원주의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의 산에 오르는 길이 다양할 뿐 아니라 우뚝 솟은 산들 자체가 여럿이다. 파니카가 지적하듯이 “중심은 지구(특정 종교)도 아니고 태양(하느님, 초월, 절대자)도 아니다. 오히려 태양계는 저마다의 중심을 갖고 있으며, 모든 은하계는 다른 은하계 주위를 서로서로 돈다. 독점적 중심이란 없다.”64) 모두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니시타니가 “공의 장에서는 도처에 중심이 있다”고 말할 때의 그 다중심이다. 니시타니의 표현대로 일체의 작은 사물도 절대 중심인 것이다. ‘즉비의 논리’와 ‘회호적 관계’는 일체 존재의 자기동일성과 상호 융통성을 보여주며, 타자 앞에서의 자기부정(非)을 통한 자기긍정(卽)에 대해 말한다. 아니, 그 자기부정(非)이 곧 자기긍정(卽)임을 말한다. 선문답에서처럼, 너는 나를 부정하게 함으로써 나를 다시 세워주는 나의 주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이런 방식으로 긍정된다. 다양한 종교들, 종교인들, 세세한 이념과 언행까지도 이렇게 해서 그 존재론적 당위성을 획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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