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 메시아론의 과정신학적 재해석

한국민중신학회(Korea Association of Minjung Theologians) :: [2007.09.20] 민중 메시아론의 과정신학적 재해석 - 김희헌:

민중 메시아론의 과정신학적 재해석


김희헌(한신대 강사)

들어가는 말


논문은 민중신학의 민중 메시아론을 과정신학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려는 글이다. 좁게는 민중 메시아론에 대한 신학적 변론이요, 넓게는 민중신학의 유산이 변화된 오늘 우리 시대에도 중요한 신학적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제안하려는 의도를 가진다. 이 글이 민중신학에 주목하는 것은 민중신학이 전통적인 서구신학의 기반이었던 철학적 신론 즉, 실체론적 존재론(substantialist ontology)에 기반한 이원론적인 철학적 신론을 극복함으로서 민중의 고난과 희망에 응답하시는 성서의 하나님을 유기적인 신학적 틀 안에 담아내려고 하였다는 점이다. 여기서 ‘유기적인’ 신학적 틀이라 함은 여러 신학적 연관들 즉, 하나님의 섭리와 민중의 자기초월적 생명활동, 그리스도의 구속과 민중의 자기구원, 종말론적 구원과 역사적 해방 등 그동안 서구신학에서 이원론적으로 분리되거나, 전자(하나님의 초월성)만 일방적으로 강조되었던 전통을 비판하고 이 신학의 중심 주제들을 ‘하나의’ 틀 안에서 그 상호관계를 역동적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민중신학의 이러한 근본적인 통찰이 민중 메시아론이라는 이름으로 제출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민중 메시아론은 안팎으로 많은 비판과 오해를 받아왔다. 그 비판의 핵심은 민중 메시아론이 민중을 메시아로 격상시켜 전통적인 기독론과 속죄론을 대체하려 하거나 약화시킨다는 것이었다. 이 비판은 민중 메시아론이 자기해명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만큼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지만, 실상 이 비판은 철학적 논증에서 자기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것은 이러한 비판이 자기논증의 신학적 틀로 전제하고 있었던 전통적인 서구신학의 이원론적인 신론이 민중 메시아론 안에서 주장되고 있는 사상들을 포괄해 낼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민중 메시아론을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주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따라서 민중 메시아론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석의 기준과 판단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는 철학적 사고의 틀 자체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민중 메시아론을 유사(類似)기독론 혹은 기독론화 된 인간론으로 이해되곤 했던 과거의 해석학적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북미의 과정신학이 지난 50여 년간 발전시켜 온 범재신론(panentheism)을 기반으로 하여 민중 메시아론을 재해석한다. 서로 다른 시대적 배경과 신학적 관심을 가진 이 두 사상이 어떻게 대화 가능할까? 분명히 이 두 사상은 서로 다른 뿌리에서 자라 온 나무와 같다. 민중신학은 고난 받는 사람들의 <사회적 상황>에 닻을 내리고, 고난 받는 자의 눈으로 신학하기를 강조하는 <민중 중심적 신학적 해석학>을 구성하고, 고난 받는 자의 편에서 정의와 해방을 이룰 <실천>을 강조하였으니 이 실천이 모든 신앙적 양심이 도달해야 할 지점이요 신학적 진리가 구현되는 존재론적 자리라고 주장하여 왔다. 이와 비교하여, 과정신학은 모든 학문과 다양한 삶의 경험에 적용 가능한 일반이론을 추구하는 <철학적 실용주의> 위에서, 양극화된 사상 중 한 극단을 밀고 가기보다는 다양한 양극성을 조화롭게 사고할 수 있게 할 철학적 토대로서 <유기체적 형이상학>을 구성하여, 실체론적 형이상학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하나님과 세상의 역동적인 상관성을 <미학적 차원>에 집중하여 그려내려 한다. 따라서 민중신학과 과정신학 사이에는 정치사회적 실천과 형이상학적 사색이라는 긴장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긴장감이 대화 자체를 가로막는다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긴장은 서로에게 창조적인 도전이 될 수도 있다. 필자는 이 두 사상의 대화를 통해 민중신학은 과정신학이 발전시켜 온 유기체사상의 철학적 언어로 민중신학이 주장하려 하였던 바를 보다 더 뚜렷하고 일관되게 밝힐 수 잇을 것이며, 과정신학은 일반이론의 구축이라는 철학적 사색에 깃들기 쉬운 중립성(neutrality)이란 문제에 대해서 민중신학을 통하여 도전받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 논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에서 민중신학의 민중에 대한 이해와 민중 메시아론은 무엇이었는지 안병무의 사상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그것에 대한 전통적인 서구신학의 반응으로서 몰트만의 비판을 예로 들어 소개하며, 그의 주장이 갖고 있는 해석학적 문제점을 밝힌 다음, 이러한 해석학적 난제를 극복할 대안으로 과정 범재신론과의 대화를 제안한다. 후반부에서 과정 범재신론은 전통적인 신학이 기반하고 있던 고전적 신론이 지닌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하려 했는지 정리한 다음, 민중 메시아론이 내포하고 있는 종말론의 이해가 과정 범재신론의 틀에서 볼 때 어떻게 재해석될 수 있는지를 논의한다.

1. 민중신학의 ‘민중’ 이해의 독특성: 정치신학, 해방신학과의 차이

민중신학이 주목받아 온 것은 민중신학이 서구에서 전래된 기독교 복음과 신앙을 한국적 토양에 맞게 재해석(localization)하였다는 점이었다. 이 재해석 작업의 특징은 한국의 종교문화사와 경제정치사의 흐름을 짊어지고 왔던 주체로 민중을 지목하고, 그들 삶의 고난과 희망에 답을 줄 수 있도록 기독교 복음과 신학을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민중을 신학의 중심주제로 세웠다는 것은 신학적 방법론에서 중요한 해석학적 변화를 의미하였다. 그것은 첫째, 민중이 기독교 선교의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한국의 기독교를 세워가는 역동적 주체라는 선교관의 변화요, 둘째, 민중이 그들의 고난 속에서 가꾸어 온 종교/문화적 전통이 서구 기독교의 확장을 통해 마침내는 청산되어야 할 전문명적(precivilized) 유물이 아니라, 민중들의 지혜가 담긴 이야기요 이는 역사 속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이야기와 분리될 수 없다는 새로운 문명관의 확립이요, 셋째, 교회는 세속과 배타적으로 분리되는 영역이 아니라 민중의 삶 속에 새롭게 세워지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론의 변화였다. 이러한 해석학적 관점의 전환은 곧 민중의 눈으로 그리고 민중의 편에서 성서를 해석하고 신학을 구성해야 한다는 ‘민중 중심적 관점’ (Minjung-centered Theological Perspective)의 확립이었다. 이것을 통해 민중신학은 텍스트와 사건을 고난 받는 자의 눈을 통해 해석하고, 고난으로부터의 해방을 신학적 실천의 목표로 삼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민중신학은 같은 시대의 대표적 신학인 남미의 해방신학, 유럽의 정치신학과 뜻을 함께 하였다. 이 세 신학은 모두 기독교 신앙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며 신학적 사유에서 전통적 믿음의 방식을 고수하는 일보다 그것이 사회적 상황 속에서 갖는 의미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이들 신학은 신학적 사유에 내포된 윤리적 함축성에 민감하였고, 이 신학적 감수성은 기독교 복음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적 영향을 걷어내는 작업에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들에게 신학이란 이론체계의 구축만이 아닌 신학적 실천이요, 이 실천은 사회정치적 해방이란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신학적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민중신학은 다른 두 신학과는 달리 심각한 비판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민중신학의 민중에 대한 이해가 전통적인 기독론의 교리체계와 쉽게 동화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었다. 민중신학이 차용해 온 민중이라는 개념은 사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수십 년 동안 사용되어온 ‘사회학적’ 개념이었다. 민중신학은 이 개념을 빌어 고난 받는 민중은 역사의 주체로서 자기해방을 향한 실천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함으로서 역사 전체에 대한 “메시아적” 역할을 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통해 이전에 ‘사회학적’ 용어로 사용되었던 민중 개념이 ‘인간론적’ 함축성 (anthropological implication)을 새롭게 얻게 되었고, 이 인간론적 개념으로서의 민중은 신학이란 체계 안에서 ‘기독론적’ 이해와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민중신학의 독특한 인간론은 전통적인 기독론과 갈등을 유발하였다.

만약 정치신학, 해방신학과 비교하여 그 신학적 차이를 크게 드러내는 것이 민중신학에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론일 것이다. 전통적인 기독론(Christology)과 구속론(Soteriology)은 그리스도의 메시아의 절대적 주권사상을 강조함으로서 그 이원론적 대척점에 있는 인간론 즉, 인간의 죄성과 구원의 피동성에서 신학적 경건을 찾은 어거스틴의 인간론과 쉽게 동화되었다. 전통신학의 이러한 기독론과 인간론 사이의 이원론적 대칭은 민중신학의 ‘관계론적’ 이해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지만, 정치신학과 해방신학은 어거스틴의 인간론에 머물러 있으면서 보다 안전하고 익숙한 길을 걸었다.

부유한 유럽의 사회적 상황 속에서 요한 B. 메츠는 해방의 시작으로서 “인간론적 혁명 (anthropological revolution)”을 외쳤다. 하지만 그 혁명의 내용과 방향은 민중신학의 인간론과 판이하였다. 메츠는 말하기를, “이 [인간론적] 혁명은... 우리의 가난과 비참함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닌 전적으로 과도한 풍요로부터의 해방이다.” 메츠의 정치 신학적 제안은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인간의 내적 회개(inward conversion)를 요구하고, 이것은 자기의 본래적 상태를 부인(negation)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어거스틴의 참회론적 인간상과 그 내용과 방향이 일치한다. 물론 이 정치신학적 주장은 오늘날 부유해진 많은 한국교회에게 훌륭한 윤리적 권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에 내포된 기독론과 신론의 내용은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여전히 이원론적 도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중신학의 이해와 다를 수밖에 없다.

해방신학은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의 해방을 신학의 핵심주제로 삼는다는 점에서 민중신학과 그 관심을 같이 한다. 그러나 해방신학의 ‘가난한 자’에 대한 인간론적 이해는 민중신학의 민중이해와 다르다. 해방신학에서 ‘가난한 자’는 자신의 해방을 위해 외부공감자의 연대(the solidarity of outside sympathizer)를 필요로 하지만, 민중은 스스로 자기조건을 초월한다. 따라서 사회정치적 해방을 향한 실천에서 두 신학 모두 “가난한 자를 위한 우선적 선택 (the 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을 강조하지만, 해방신학의 가난한 자에게는 그 선택(option)이 ‘존재론적’으로 요청되는 반면, 민중신학에서는 그 선택이 ‘윤리적’으로 권고될 뿐이다. 이러한 차이는 해방신학이 어거스틴의 인간론을 ‘가난한 자’에게 적용시켜, 그들 역시 죄인일 뿐이며 해방과 구원에서 신의 “초자연적” 섭리를 필요로 하는 피동적 존재일 뿐이라는 인간론적 전제를 갖는 데에서 생긴다.

해방신학이나 정치신학과는 달리 민중신학은 전통적인 기독론적 고백과 마찰을 빚어왔는데, 이것은 민중신학이 이들 두 신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론을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민중의 자기초월성을 인간론의 핵심적 이해로 삼은 민중신학은 인간의 죄성(罪性)과 구원에서의 절대적 피동성을 강조해 온 전통적 기독론과는 불협화음을 빚어왔다. 때문에 민중신학이 기독론을 인간론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비난을 자주 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선 ‘죄’의 개념과 그 개념이 사용되는 사회/종교학적 정황, ‘구원’의 의미와 그 의미를 뒷받침하는 신학적 전제들, ‘그리스도’라는 신학적 상징이 갖는 의미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다양한 해석학적 전통 등에 대한 사전 검토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물론 민중신학은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서 의미 있는 답변을 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토론은 이 짧은 논문이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민중신학의 독특한 민중이해가 전통적인 기독론과 갈등을 빚어왔지만, 그것이 기독론 자체에 대한 거부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갈등의 원인은 민중신학의 인간론과 기독론적 고백 자체의 양립불가능성에 있지 않고, 민중신학의 인간론이 전통적인 기독론의 신학적/철학적 ‘전제(presupposition)’와 화해할 수 없었다는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민중신학이 주목했던 민중 즉, 한국 근현대사에서 독특하게 경험된 자기초월적 민중이란 개념은 신과 인간, 구세주와 피구원자, 하나님의 나라와 세계, 이들의 상호관계를 이원론적으로 대립시켜 설명하려 했던 (전통신학이 기반한) 철학적 세계관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민중신학의 민중 이해는 역동적인 관계성에 주목하여 이원론적 세계관을 극복하려는 ‘관계론적’ 인간론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관계론적 사상은 인간과 세계 안에 있는 자기 창조성(self-creativity)을 부인하는 초월적 이신론, 또 이신론의 전제 위에서 신-인이라는 초자연적 이미지로 그려진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의 표상과는 화해하기 힘든 운명에 있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적 활동에 당신의 계획을 가지고 참여하고 이끄시는 신을 그려내는 범재신론 (panentheism), 또 이러한 신론의 기반 위에서 세상을 “창조적 변화 (creative transformation)”의 과정으로 인도하는 구속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는 민중신학의 사상이 일맥상통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민중신학이 1990년대 이후 신학적 체계화를 이루는데 소홀하여 왔다는 자성의 소리가 있다. 또 한편에서는 민중신학의 역할은 끝났다고 말하는 신학적 기능주의 (theological functionalism)의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민중신학의 관계론적 세계관은 21세기를 열어가는 대표적인 신학적 방법론일 뿐만이 아니라, 아직 한국 기독교 사회 속에 깊이 남아있는 구시대적 잔재들 즉, 문자주의적, 율법주의적, 제국주의적, 배타주의적, 이원론적, 비역사적, 탈정치적, 개인주의적 신학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민중신학 안에 내포된 신학적 철학적 함축성을 어떻게 이끌어내어 구성해 내느냐에 달려있다고 보겠다. 필자는 그 일을 안병무의 민중 메시아론에서 출발하려고 한다.

2. 안병무의 민중 메시아론

민중 메시아론의 첫 출발은 철학적 추상에 있지 않았고, 한국 근현대사에서 뚜렷하게 등장한 민중의 삶에 대한 신학적 증언에 있었다. “왜 저들은 가난한가? 왜 저들은 굶주려야 하는가? 왜 저들은 슬피 울어야 하나? 누가 저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욕하고 누명을 씌우는가? 기독교 역사는 오랫동안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을 內心의 문제로 처리해 버렸다.” 안병무의 이러한 신학적 관심은 그를 전통신학의 테두리 안에 남아있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그는 인간을 단순히 죄인이라는 보편적인 범주에 넣어버리는 전통적인 인간론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문제점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고난 가운데 있는 민중에게 다시 한 번 신학적 굴레를 씌우는 일로 밖에 이해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중의 삶에 대한 이 “증언의 신학”은 신학적 사고의 구성이라는 작업과 별개의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안병무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민중은 “생명”이라고 개념 규정을 시도하지만, 실상 그의 민중 메시아론은 이미 전통신학과는 전혀 다른 역동적인 인간론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것은 민중이 자기초월적, 자기해방적, 자기구원적 성격을 지닌 존재요, 이러한 이해는 성서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표상과 이원론적 배타성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신학적 확신이었다. 특히 이러한 인간론은 서구신학의 “주-객 도식”과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려는 신학적 기획의 근거가 되었다.

‘관계론적’ 인간 이해는 안병무의 성서독법의 독특성 즉, 예수를 갈릴리 민중이었던 오클로스와의 관계 안에서, 그들의 사회적 상황과 연관 지어, 읽을 수 있게 하는 동인(動因)이 된다. 안병무에게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예수의 신적인 사생활이 아니라 오클로스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관련되어 읽혀져야만 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오클로스와의 관계성과 상황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안병무는 “예수사건”이라는 개념을 선호한다. 분명 이 “사건”이라는 개념은 신-인(神-人)의 이미지를 지닌 초자연적 존재로 예수를 기술해 온 전통적인 서구신학의 기독론적 이해와 대립(incompatibility)되며, 그 신학의 철학적 토대인 실체론적 존재론(substance ontology)과는 다른 철학적 함축성을 갖고 있다. 안병무의 “사건” 개념은 ‘내적 연관성’ 즉, 예수와 오클로스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예수가 민중을 해방만 하는 게 아니라 민중이 또 예수를 해방하는 면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연속성”에 대한 강조는 신과 인간, 구원자와 피구원자 사이의 불연속성을 필수불가결한 신학적 전제로 놓은 이원론적 서구신학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병무의 민중 메시아론은 관계론적 인간론과 예수와 오클로스의 연속성에 착안한 성서 해석학이라는 두 신학적 기둥 위에 지어진 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민중 메시아론은 다음과 같은 논리와 구조를 갖는다. 첫째, 예수와 그의 민중 오클로스 사이에는 본질적인 “연속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예수의 삶과 행함은 오클로스가 놓인 상황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져야 한다. 예수의 죽음/죽임 당함은 본성상 자기 초월을 경험할 수 없는 후패한 인간을 향한 신의 대속활동(vicarious atonement)으로 이해되기 보다는 민중의 고난의 궁극적 표현으로 이해되어져야 하며, 예수의 부활은 성자의 개인적 성취가 아닌 역사적 예수를 통해 드러난 그리스도 사건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둘째, 이 그리스도 사건은 역사적 예수의 삶에서 극적으로 드러났지만, 그것이 그리스도 사건으로서의 유일회적인 것(once-for-all uniqueness)은 아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분이라면, 그리스도 사건은 “화산맥”처럼 역사를 타고 흐르며 민중의 사건 속에서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셋째, 모든 민중의 모습이 미화될 수는 없다. 그러나 민중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기 초월성”에 있다. 만약 구원이 보다 구체적 언어인 해방이란 말로 표현될 수 있다면, 민중은 자기 해방/구원의 주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또한 모든 민중의 고난을 메시아적 고난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민중의 고난이 개인적 고난이 아닌 전체적 고난으로 이해될 때,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처럼 민중은 메시아(적 민중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민중의 사건은 그리스도 사건이요, 성령사건이다. 따라서 우리는 민중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서 그리스도 사건에 참여하고, 민중의 고난에 응답함으로서 “메시아적 경험”을 하게 된다.

분명 안병무의 민중 메시아론은 민중을 메시아로 드높여 전통적인 기독론을 대체하려는 신학적 기획일 수는 없다. 그는 민중 메시아론을 통해 한편에서는 이원론적 전통신학을 극복하려 하였고, 다른 한편에서 민중의 고난에 동참하는 참여의 윤리를 강조하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안병무는 ‘민중 중심주의’와 ‘예수 중심주의’가 서로 대립될 수 없다고 보았지만, 이러한 사고가 전통적인 기독론의 이분법적 도식 안에 놓였을 때 그것은 기독론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안병무의 민중 메시아론이 민중신학의 ‘기독론’이 아닌 한, 민중 메시아론을 기독론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은 ‘범주 설정의 오류 (A Fallacy of Categorization)’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오히려 민중 메시아론을 보다 더 큰 범주 즉, 신과 인간, 그리스도와 민중, 하나님 나라와 역사의 상호관계에 대한 유기체적인 이해를 지향하는 광대역의 신학적 패러다임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른 접근법일 것이다.

3. “메시아론의 혼동”이라는 비판에 대한 고찰

역사적으로 서구의 많은 진보 신학자들이 민중신학의 출현을 축하하였다. 하비 콕스는 민중신학의 “기독교의 비유럽화 (de-Europeanizing of Christianity)” 작업을 치하 하였고, 로버트 맥카피 브라운은 민중신학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를 지향하는 참여와 헌신”의 신학적 실천에 주목하였다. 이들은 민중들의 종교문화적, 사회역사적 경험이 신학화되는 작업의 중요성에는 흔쾌히 동의하였지만, 민중 메시아론에 이르러서는 입장을 달리하였다. 그들의 비판은 아마도 해방신학자 보니노가 “메시아론의 혼동 (messianic confusion)”이라고 표현했던 말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민중신학의 입장에 대한 광범위한 신학적 질문은 일군의 독일 신학자 그룹에서 제기되었다. 이들은 민중 메시아론에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첫째, 민중신학은 계시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기독론적 문제를 갖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 중심적 접근방법”이 교회와 세상, 하나님 나라와 세속사를 분리시킬 위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에서 이 그리스도 중심주의는 포기될 수 없는 핵심사항이다. 따라서 민중신학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그리고 그분과 “분리되어” 나타날 수 있고, 역사의 일반적 사건과 연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가 민중들의 집단적 (collective)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 셋째,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주장은 정당화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이해가 민중의 자기구원이라는 주장과 동일시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장은 역사적 해방과 종말론적 구원 사이에 있는 긴장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넷째, 만약 성서적 인간론의 급진성 즉,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리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통해서만 구원될 수 있다는 이해가 보존된다면, 우리는 민중 역시 ‘죄’에 가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민중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놓인 차이성에 대해서 민중신학의 교회론은 분명한 입장을 보여야 할 것이다.

위의 질문들은 민중신학이 밝혀야 할 신학적 중심주제들임에 분명하다. 이에 대한 토론은 이 글의 후반부에 보다 자세하게 이어질 것이다. 여기서는 안병무의 신학적 사상의 윤곽을 보여줄 수 있는 간략한 내용만 소개하고자 한다. 안병무는 무엇보다 먼저 그러한 질문이 안고 있는 신학적 어려움의 뿌리는 서구 신학이 이원론적 사상에 깊게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둘째, 역사는 계시의 이차적인 자료가 될 수 없으며, 역사 밖에서는 계시도 있을 수 없다. 셋째,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 무엇으로도 제한받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은 “예수 사건”에만 제약될 수 없는 것이다. 넷째, 전통적인 ‘죄’에 대한 개념은 반드시 재구성 되어야 한다. 그것없이 민중과 민중의 자기구원이라는 관계는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다섯째, 해방과 구원이 가진 본질적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스도와 민중을 가르는 절대적 이원론을 극복해야만 한다. 여섯째, 하나님의 백성은 역사적으로 제도화된 교회만을 의미해서는 안 될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짊어지고 나아가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 가능해야 한다.

민중신학자와 독일신학자 사이의 신학적 차이성은 다양한지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uniqueness)”을 해석하는 방식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다. 독일 신학자들은 민중 메시아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우리와 하나님의 화해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필수불가결한 주제”를 부정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안병무와 몰트만 사이에 있었던 유명한 논쟁도 이 주제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몰트만은 [신학의 경험들 Experiences in Theology (2000)]이라는 책에서 많은 공간을 할애하여 민중 메시아론을 재해석하고, 안병무에게 가졌던 오래된 질문을 다시 제기한다. 몰트만은 건강한 기독론 구성을 위해서는 “포괄적인 연대의 기독론 (inclusive solidarity christology)” 즉, 민중의 고난을 함께 나누는 “형제”로 이해되는 그리스도론과 “배타적인 표상의 기독론 (exclusive representation christology)” 즉 민중을 그들의 고난으로부터 구원할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론, 이 양자를 모두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몰트만은 안병무의 기독론이 “포괄적 연대의 기독론”에 일방적으로 기초함으로서 고난의 연대성을 강조하는 그리스도론을 말하고는 있지만, “배타적 표상의 기독론”을 상실하여 민중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기독론적 이해가 없으므로 결국 “민중의 고난은 증가될 수밖에 없는” 신학적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만약 민중이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의 역할을 하여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면, 그럼 누가 민중을 구원하느냐”고 묻는다.

분명히 몰트만과 안병무는 민중의 존재론적 성격과 그리스도의 기독론적 역할에 대해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다. 몰트만은 “배타적 표상의 기독론”의 불가피성을 전제하고서 “누가 민중을 구원하느냐”고 질문하고 있지만, 안병무에게는 그런 질문 자체가 불가능하다. 오히려 안병무는 민중의 자기 초월적 활동이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고, 그리스도는 민중의 자기구원 행위에 어떻게 참여하는가 하고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물을 수 있겠다. 몰트만을 위시한 많은 서구신학자들이 비판하듯이 안병무는 “메시아론의 혼동” 가운데 있는가?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보다 진정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오해를 낳게 만드는 서구신학 사유의 이원론적 메카니즘, 그리고 그러한 신학적 유추를 조절하는 형이상학적 틀에 대한 깊은 성찰과 비판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없이, 민중 메시아론을 전통적인 기독론의 이해와 병치시키는 것은 논의의 공전만 가져올 뿐이다. 뿐만 아니라, 소위 ‘전통’이란 기준에 기대어 민중 메시아론을 이해해왔던 기존의 논의방식은 민중 메시아론이 가리키고 있는 본질적 가르침에서 항상 빗나가고 말 것이다.

4. 과거의 기독론적 논쟁의 문제점과 범재신론적 토론의 필요성

민중 메시아론을 전통적인 기독론의 이원론적 틀에 집어넣어 토론하면서 민중 메시아론이 “메시아론의 혼동”을 유발하였다고 이해하였던 전통적인 논쟁에는 최소한 두 가지의 문제점이 있었다고 본다. 그것은 첫째, 형이상학적 언어와 종교적 언어의 관계에 대한 혼동 혹은, 도그마적 믿음을 보존하기 위한 형이상학의 포기요, 둘째, 전통의 권위에 대한 잘못된 사용이다.

몰트만은 전통적인 신학이 안고 있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오늘 우리 시대에 깊은 영감과 지혜를 가져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안병무와의 대화에서 여전히 전통신학이 범한 오류를 드러내었다. 그것은 신의 초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마련한 신과 세계 사이의 절대적 간격을 이분법적으로 보전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신과 세계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이해를 희생하고 결국 성서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왜곡시킨다는 점이다. 몰트만은 두 개의 기독론 즉, “속죄(atonement)의 기독론”과 “연대(solidarity)의 기독론”을 한데 묶어 자신의 기독론의 두 축으로 삼으면서 전통적인 기독론의 약점을 극복하려 함과 동시에 민중 메시아론을 비판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하지만 과연 그의 “속죄의 기독론”과 “연대의 기독론”은 서로 상충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는가? 몰트만이 그의 “연대의 기독론”을 통해 강조하고 있듯이, 만약 하나님이 당신의 삶을 민중의 고난과 온전하게 “연대”시켰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속죄”의 대속행위를 필요로 하실 수밖에 없으실까? 몰트만의 주장대로 그 “속죄”가 없으면 민중의 고난은 증가할 뿐이고, 반대로 민중의 고난은 그 “속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연대”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의 충분성은 민중의 고난을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분량인가? 아니면 하나님은 민중의 고난에 대해서만 신적 “연대”를 하고, 민중의 고난의 해결을 위해서는 (연대함이 없이) 당신의 “배타적인 대속”을 베푸시기로 하셨을까? 그리고 그것은 어거스틴이 말한대로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죄성 (intractable sin) 때문인가? 위의 질문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몰트만의 “속죄의 기독론”이 건강한 신론을 구성하는데 어려움을 가져옴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적 형벌-대속적 속죄론 (Calvinist penal-substitution theory)”을 철저하게 기반하고 있음으로써 개혁교회의 대표적인 속죄론적 신앙을 충분히 만족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안병무에게는 몰트만의 “속죄론”이 민중신학의 이해와 어울리지 못하며, 그것 자체가 많은 신학적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 듯 하다. 몰트만은 자신의 관점에서 안병무에게 “속죄론”이 없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안병무 역시 속죄론적 이해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병무의 주장은 캔터베리 대주교인 안셀름의 속죄론을 비판하였던 젊은 신학자 아벨라르드의 이해와 비슷하다. 안병무는 “죄를 지은 사람을 벌주는 대신 예수를 죽였다고 하는가 하면 예수가 하느님을 대신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되면 하느님도 이 법 속에 매”이게 된다고 주장한다. 안병무는 이러한 이해를 “복음주의적 설명의 자가당착”이라 말하고, 아벨라르드는 이러한 신은 성서의 신이 아닌 “야만적 신”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아벨라르드가 예수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게 할 양심의 찔림의 문제로 읽었듯이, 안병무는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오클로스의 수난을 보고 또 이것이 예수의 민중들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서”라는 그리스도론적 질문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우리는 여기서 몰트만의 주장과는 다르게 안병무가 속죄론적 기독론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지 않음을 보게 된다.

문제는 어떠한 기독론적/속죄론적 이해가 통일된 신학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느냐 하는 점이다. 필자의 눈에는 몰트만의 이해가 형이상학적 언어와 종교적 언어를 혼동함으로서 신학적 문제를 유발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적 언어로서 하나님의 ‘대속적 고난’이라는 사상 자체는 그것이 고난 받는 민중에 대한 하나님의 공감 (divine sympathy)이라는 점에서 민중신학의 이해와 대립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안병무가 느낀 몰트만의 신학적 문제는 하나님의 화육 (incarnation)이 오직 예수에게만 배타적으로 일어난다고 이해하는 점이다. 그래서 몰트만은 예수만이 민중을 구원할 뿐이지 그 반대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몰트만의 형이상학은 하나님의 화육이 민중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배제했으며, 따라서 민중의 고난을 제거하기 위하여 “배타적 속죄의 기독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결론짓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과연 “속죄의 기독론”이 민중의 고난의 ‘실재성 (actuality)’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형이상학적 견지에서 볼 때, 그것은 단지 심리학적인 (psychosomatic) 면에서 그러하다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고난을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써 자신의 고난에서 놓여남을 (심리학적으로) 경험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 자체가 고난의 ‘실재성’ 자체를 제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대속”이란 종교적 언어로 이해되어야지 형이상학의 언어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하여, 고난에 대한 위대한 공감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종교적인 희망의 문제요, 고난의 실재적 극복은 여전히 민중의 계속되는 자기초월에 의해 가능할 뿐이라는 것이 바른 신학적 이해일 것이다. 민중의 고난이 극복되기 위해서 반드시 “속죄의 기독론”이 필요하다는 몰트만의 주장은 민중의 고난의 실재성의 문제에 답을 주지 못하며, 어쩌면 그도 원치 않았던 도그마적 은폐(disguise)로 전락할 위험에 놓이게 된다.

둘째, 민중 메시아론을 비판하였던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기독론적 믿음을 ‘전통’이 부여한 권위로 여기고, 민중 메시아론은 전통적인 기독론적 믿음에서 떨어진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성서와 기독교의 역사 속에 나타난 기독론은 단 한 개의 전통이 아닌 다양한 전통들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그 시작부터 “여러 개의 다양한 기독교”였고, 이를 바탕으로 “최소한 80여개의 복음서”가 기록되었으며, 또 이 복음서들은 다양한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그려내었다. 현재 신약성서에 포함된 4개의 복음서도 도식화된 기독론의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지를 않다. 따라서 오늘날 신학적 토론의 어려움은 기독론적 토론의 표준으로 삼을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설정하는데 최종적 판단의 근거가 없다는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전통의 다양성 뿐만 아니라 기독론 이해의 현재적 다양성 때문에 “신학자의 과제는 결코 모든 기독교인에게 말하는 것이 될 수 없다”는 존 캅의 주장은 타당하다. 이러한 조건에서 오늘날의 기독론적 논의는 과거의 교리적인 이해를 단순히 반복하는 것으로 채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기독론의 중심물음은 어떻게 그리스도라는 기독교의 살아있는 “상징 (symbol)”이 여전히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데 그 중요성을 잃지 않고 계속적인 의미를 줄 수 있는지” 그 “방식(ways)과 관점(respects)에 대한 물음이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관심에 대해서 민중신학은 충분히 성숙한 방식으로 답변하려고 해 왔으며, 민중 메시아론이 바로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정리하자면, 민중신학에 대한 지난 시기의 “메시아론의 혼동”이라는 비판은 그 자체가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첫째, 신의 초월성이 강조된 전통적 기독론은 역사와 민중의 삶에 참여하는 신의 관계성에 대하여 적절한 답을 주지 못하였다. 이원론적 틀을 기초로 했던 이러한 비판의 자기한계성은 민중 메시아론이 가리키고 있는 관계론적 사유를 결코 포괄해 낼 수 없었다. 둘째, 자신이 기반한 한 전통 (a tradition)을 바로 전통 자체(the tradition)가 가진 권위로 생각하며 민중신학을 비판했던 여러 시각들은 전통이라는 것이 새로운 상황에서 어떻게 의미를 계속적으로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보다 더 중요한 관심에는 소홀하였다.

민중 메시아론은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져야만 하는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민중 메시아론이 말하(고자 하)였던 관계론적 신학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해석학적 선결과제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첫째, 민중의 자기 초월성과 하나님의 섭리론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범재신론적 해석학적 지평이 먼저 마련되어야 한다. 둘째, 민중 중심주의와 그리스도 중심주의가 결코 이원론적으로 분리되어야 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것은 안병무도 지적하였던 전통적인 서양철학의 실체론(substance metaphysics)을 극복할 관계론적 사고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먼저 이 두 가지 조건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는지 과정신학을 예로 들어 소개하고, 그리고 나서 과정신학의 관점에서 민중 메시아론은 어떻게 재해석될 수 있는지 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종말론에 집중하여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5. 과정신학을 통해 마련되는 새로운 신학적 이해

여기서는 과정신학의 신론이 가진 특징을 세 주제로 나누어서 설명하기로 하겠다. 첫 번째, 과정신학의 신론의 특징과 그것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철학적 배경에 대해서 다룬다. 둘째, 과정신학을 통해 마련된 신론이 어떻게 성서의 하나님과 기독론적 성육신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지 설명하겠다. 셋째, 세상과 하나님의 관계성에 대한 과정신학의 설명을 과정신학이 이해하는 신의 ‘전지전능’의 개념을 예로 들어 말하겠다. 이것은 민중 메시아론의 핵심사상이라 할 ‘민중의 자기초월성’ 개념을 재해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5-1. 양극적 과정 범재신론: 단극적 신론에 대한 비판적 재구성

일반적으로 범재신론 (panentheism)이란 신앙과 철학을 동시에 만족시키려는 포괄적 성격의 신론으로서, 종교의 신학적 감수성을 다른 학문들과도 소통 가능하도록 일관된 철학적 체계 속에 담아내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K. C. F. 크라우스 (1781-1832)에 의해 처음 이름 지어진 이 개념은 “하나님은 [당신의 신적인 삶 속에서] 세상을 포함하고 통합하면서도, 세상을 초월 하신다”는 기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범재신론의 기본적인 관점들은 사실 기독교 교리의 역사 가운데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일관된 신학체계 속에 담아내려 했던 기독교 신학의 관심과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찰스 하트숀에 의해 범재신론이 새롭게 제창되기 시작했던 것은 지난 시기의 철학적 신론들이 이 과제를 만족스럽게 수행해 오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과정신학의 범재신론은 철학자 A. N. 화이트헤드(1861-1947)의 양극적(兩極的, dipolar)인 성격의 신(神) 개념을 사용하여 기존의 신학적 문제들을 극복해보려는 신론이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우주론을 다룬 [과정과 실재, 1929]의 마지막 장에서 세계와 신의 관계에 대한 가장 원숙한 생각을 피력한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세계와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는 신은 두 개의 축 즉 정신적 축으로서 “시원적 본성 (primordial nature)”과 물질적 축으로서 “연관적 본성 (consequent nature)”을 갖고 있다. 먼저 신은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시원적으로 예견 (primordial envisagement)하고 이 예견을 조화로움 가운데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적 독특성을 가진다. 이 조화로운 신적 예견은 세상의 변화를 통해 구현된다. 변화가 이루어진 곳은 세상이지만 또 이것은 신의 연관적 본성의 장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변화는 신의 의지가 일방적으로 실현되어지는 과정이 아니라는 점은 과정신학이 말하는 신의 힘의 행사방식의 독특성이다. 세상의 변화는 신의 힘이 미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자기 운명에 대한 자유로운 자기결정 과정이기도 하다. 세상의 자기 결정이 있기에 거기 세상의 창조성이 있고, 과거에 없던 새로움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 새로움은 신의 연관적 본성으로 인해 신에게 다시 영향을 주게 되고, 신은 이 새로움을 자신의 신적 삶으로 영구히 받아들인다. 화이트헤드에게 우주는 신과 세상의 역동적 관계성을 통해 움직이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신은 세상을 이상적인 목적으로 이끄시고, 세상은 자기 새로움을 통해 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이 세상과 신의 관계는 서로 자족하는 실존들의 외적 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위하여 반드시 상대를 필요로 하는 내적(internal)관계라는 것을 비실체론적 존재론(non-substantialist ontology)으로 뒷받침한다.

과정신학의 토대를 구축하였던 찰스 하트숀은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 즉 비실체론적 형이상학과 양극적 신 개념을 통하여 과정신학의 범재신론을 구성한다. 그의 범재신론은 서양의 사상사에 등장했던 두 개의 극단적인 철학적 신관에 대한 비판이었다. 하나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앙을 뒷받침했던 철학적 신관 (classical Christian theism)으로, 거기에서 신은 “필연적 초월성과 우연적 내재성”을 가진 존재였다. 다른 하나는 “필연적 내재성을 갖지만 결코 초월성이 있을 수 없는” 신을 그린 범신론(pantheism)이었다. 이렇게 필연적 초월성만 강조되거나 초월성이 없는 내재성만 지닌 단극적(monopolar)성격의 신론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신론이 실체론적 형이상학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트숀은 말한다. 실체론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실체(substance)는 일정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스스로 존재하며, 자기 존재를 위해 다른 존재에 필연적으로 의지하지 않는다. 따라서 두 개의 실체는 서로를 공유하지 않는다. 이것은 신과 세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서로를 공유할 수 없다는 실체론의 전제 위에서는, 신이 세상과 분리되어 세상의 ‘밖에’ 존재하든지, 신은 세상과 ‘구별됨이 없는 같은’ 존재라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양자택일(either/or choice)은 실체론적 철학이 논리적 일관성을 가질수록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된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은 신앙이 깃들 근거인 신의 초월성을 보존하기 위해, 신과 세계의 절대적 간격을 강조하는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신론의 철학적 논증의 근거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신 즉, “자기 변화가 없는 창조자 (the unmoved Mover)”라는 개념을 받아들였다. 이 초월적인 신은 세상에 일방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신으로서, 세상의 가치(value)에 영향을 받지도 않고 세상의 움직임(cause)에 영향을 받지도 않는 완전한 신이었다. 그러나 이 철학적 신은 우리가 성서에서 발견하는 신,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의 탄식에 응답하여 사랑과 창조와 구속의 일을 해나가는 신과는 전혀 다른 신일 수밖에 없었다. 하트숀은 기독교 신학이 주로 몸담아 온 이 고전적 신관을 “초월적 이신론 (pure transcendental deism)”이라 칭하였다.

한편 범신론은 세상 속에 철저하게 내재한 신을 말하였다. 스피노자에 의해 완벽한 모습으로 구현된 서양의 범신론은 신의 초월적 성격만 일방적으로 강조되어온 서양신학의 전통에 대한 항거이자, 신의 초월을 말하면서도 신의 내재의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동경을 멈추지 않았던 실체론적 철학의 자기모순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리고 범신론에 의해 신의 내재성은 완벽하게 구현되었고, 세상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이유에 대한 신학적 근거도 마련되었다. 신은 세계의 “지탱자(the Sustainer)”로서 “신의 내재적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세상의 만물이 존재할 근거를 얻게 된다”고 이해되었다. 그러나 신의 내재성을 살려내기 위해 범신론은 신과 세계를 동일한 실체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실체론적 사유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신의 또 다른 측면 즉, 세상을 지어가는 존재로서 신이 지녀야 할 초월성은 상실하게 되었다. 결국 신의 초월성에 확고하게 기반한 종교적 믿음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었던 범신론은 그 철학적 치열성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론의 철학적 대안이 되지 못하였다.

범재신론은 기독교 신학이 안고 있었던 위와 같은 철학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하였다. 그리고 과정신학의 범재신론은 그 문제가 실체론적 철학이 갖고 있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극복함으로써만 해결 가능하다고 생각하였고,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적 형이상학을 신학에 끌어들인다. 새로운 형이상학에 기반한 과정 범재신론은 당연히 전통적인 기독교 신관이 그려내었던 신과 세계의 관계를 다르게 서술하게 되었다. 과정 형이상학을 여기서 모두 다룰 수는 없을 것 같다. 대신 과정 범재신론이 가진 몇 가지 특징에 대해서만 요약하여 소개하겠다. 첫째, 전통적인 신학에서 세상은 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데 “궁극적인 중요성”을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의 완전성은 세상에 의지하지 않고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정 범재신론에서 세상은 신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그 궁극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둘째, 전통신학에서 신은 세상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고 (impassible), 세상에 의해서 변화되지도 않는다고 (immutable) 이해되었다. 그것은 전통신학의 철학적 근거였던 희랍적 사유에 따르면 완전한 (perfect) 존재에게 변화란 부패 (corruption)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신의 완전성(perfection)은 이미 불변성(unchangeability)이 전제된 것이요, 따라서 거기에 무엇이 더해질 수 있다고 생각될 수 없었다. 그러나 과정 범재신론은 신의 완전성은 세상의 창조성을 자기 삶으로 수용하는 무한성이요, 무한한 풍요로움 (indefinite enrichment)에 대한 가능성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셋째, 전통신학에서 신의 전지 (omniscience)란 세상이 변해갈 모든 미래적 세부사항을 포괄하는 것이며, 이것은 마치 세상의 미래가 신의 지식 안에 이미 그려진 것처럼 이해되었지만, 과정 범재신론에서는 신 역시 세상에서 생겨나는 새로움을 경험하는 과정 중에 있으며 따라서 세상은 자신의 가능성을 충분히 실현해 나가는 것으로 이해된다. 넷째, 전통신학에서 신의 전능 (omnipotence)란 세상의 움직임에 대한 신의 단독결정 능력 (all-determining power)이요, 세상의 변화는 신의 유일한 최초의 작용인 (the sole primary efficient cause)에 의거한다고 설명된다. 그러나 과정 범재신론에서 신의 힘은 강압적 작용인 (coercive efficient cause)으로서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힘이 아니라 설득적 목적인 (persuasive final cause)으로 세상의 창조성을 탄생시키는 신의 사랑(compassion)의 힘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이제 과정 범재신론을 통해서 볼 때 성서의 하나님은 어떻게 이해되며, 민중 메시아론의 걸림돌이었던 기독론은 어떻게 재구성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다.

5-2. 과정 범재신론에서 바라 본 성서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육신

과정 범재신론은 신학적 일관성을 지키면서 기독교의 믿음이 현대인의 신앙의 삶에 부합할 수 있도록 재해석하려 하였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두 가지 주제는 다음과 같다. 성서의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맺으시는 역동적인 관계 즉, 초월과 내재의 두 차원을 어떻게 동시에 일관된 신학적 관점으로 서술해 낼 것인가? 기독론의 최대의 신비인 예수의 인성 속에 깃든 하나님의 화육 (incarnation)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첫째 전통신학이 초월적 이신론을 자신의 철학적 신관으로 삼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내재적 차원 즉 ‘신적 내재의 필연성’의 차원을 상실하였던 점, 둘째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칼케돈의 신조를 실체론적으로 해석함으로서 결국 예수를 신-인의 이미지를 지닌 ‘초자연적’ 인물 (God-man supernaturalistic figure)로 설명하고 이 이미지로 기독교 신앙의 기준을 삼으려고 했던 점을 교정해내는 작업과 연관되어 있다.

과정신학의 범재신론이 관심하는 것은 전통적인 신관의 토대인 철학적 틀을 재구성하여 기독교 신앙이 바른 신관 위에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신학이 지닌 ‘철학적 비일관성’의 문제 때문만이 아니라, 전통신론이 가정하는 신 개념이 성서의 하나님의 모습을 왜곡시키고 그 결과 신앙인의 믿음의 구조를 일그러뜨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통신학은 신의 무한하고 (Infinite), 절대적이고 (Absolute), 영원한 (Eternal) 특성에 주목하여 자기변화를 경험하지 않는 신의 완전성 (Perfection)이란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이로 말미암아 신은 세상과 우연한 관계를 맺을 뿐 세상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는 분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이해가 이스라엘의 고통에 응답하시며 자기 뜻을 돌이키기도 하시고 새로 세우기도 하시는 성서의 신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성서는 신에 관한 신학적 논증서가 아니다. 다만 성서 속에는 신에 관한 다양한 이미지가 담겨있고, 신을 이해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학적 발전과정의 흔적이 있다. 그러나 성서의 사람들에게 핵심적인 것은 자신의 구원의 계획을 갖고서 끝없이 관계하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신관의 발전 또한 신학적 사유의 체계화 과정만이 아닌 실제적 경험의 과정을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포로기에 형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초월적 창조주 사상 또한 계약의 파트너로서 이 세상 속에서 당신의 언약을 반드시 이룰 내재적 구원자라는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역사 속에서 고난 받는 백성에 대한 구원의 약속은 신의 내재적 ‘필연성 (necessity)’이 전제되지 않는 한 저 세상에서의 구원 (salvation as afterlife)이라는 의미 없는 이원론적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사실 초월적 이신론은 구원을 그렇게 이해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내재를 ‘비항시적 우연’으로 설명하는 전통적인 철학적 신론은 성서의 하나님의 모습을 왜곡시킬 수밖에 없었다.

과정 범재신론이 전통신학의 철학적 신론을 비판하는 것은 성서적 하나님의 특징을 포괄적으로 드러내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전통 신론에서 파생되는 잘못된 윤리적 함축성을 제거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전통 신론은 ‘천상의 제국 통치자’의 이미지로 신의 초월성을 그려내곤 했다. 이 천상의 황제 이미지는 수많은 신학적 문제점을 발생시키면서, 보다 본질적 모습이라 할 은총과 사랑으로 세상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내재적 모습을 퇴색시키고 말았다. 신론에서 신의 내재성의 후퇴는 신학적 불균형의 문제이기보다 이데올로기적 왜곡이라는 점에서 더 위험하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위대한 철학적 발견이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이들이 어떻게 질서를 향한 세상의 움직임의 근원이 되는 초월적 신(the primordial Being)이 자신의 본성(nature)을 세상과 나누었는지를 탐구했다는 점이다.” “[초월적 신에 의해] 부과된 법(Imposed Law)에 대한 사상과 [세상 안에] 내재된 법(Immanent Law)에 대한 사상을 화해시키려” 했던 이들이 제안했던 신학적 답은 “질서를 향해 나아가는 동향의 필연성은 초월적 신의 의지로부터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내재하는 하나님과 함께 본성적으로 나누고 있는 바로 그것으로부터 생겨났다”는 것이었다. 신의 내재성에 대한 근본적인 사상이 바로 이들에 의해서 기초가 놓여졌다는 점에 화이트헤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이 사상에 기초하여, 신이 일방적인 초월성을 지닌 존재라는 가정에 근거하여 설정된 “우상숭배적인 유신론적 상징주의”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신론의 역사에서 이런 상징주의는 “통치하는 황제 (the ruling Caesar)”의 이미지로, 혹은 “무정한 도덕주의자 (the ruthless moralist)”로, 때론 “자기 변화가 없는 창조자 (the unmoved Mover)”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성서의 하나님은 세상과 동떨어져 존재하기보다는 세상 안에 거주하고, 독재가 아닌 사랑의 힘으로 일하며, 세상이 “참과 아름다움과 선함”을 향해 움직일 수 있도록 목표를 부여하는 분이다. 이러한 속성을 가진 신이 바로 “갈릴리에 기원을 둔 기독교 (the Galilean origin of Christianity)”에서 발견된다고 화이트헤드는 말한다.

과정 범재신론은 세상과 자신의 본성을 나누는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이해는 나사렛 예수의 인성에 임한 하나님의 화육(incarnation)의 문제에 대해서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과정 신학자마다 조금씩 다른 견해를 갖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넓은 의미에서의 삼위일체론 즉, “초월적인 신과 예수 안에 있는 신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신은 모두 동일한 신이다”는 존 캅의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과정신학은 보다 민감한 기독론의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가진다. 예수 그리스도 안의 인성과 신성의 결합, 이 신학적 문제는 다음 두 가지 질문으로 나누어 토론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어떻게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본질성 (consubstantiality)’을 가졌고 이와 동시에 우리와 같은 인간성을 가졌다는 칼케돈의 기독론을 해석할 것인가? 또 이 기독론적 신조는 칼케돈 회의 이후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가?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가장 현저한 기독론적 해석의 전통은 예수의 진정한 인성이 제거되어가는 과정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점이다. 칼케돈 회의 이후의 신앙인들에게 예수는 “실제적인 인성으로부터 멀어진 신인(神人)의 초월적 존재”로 이해되어 왔고, 또 이러한 이해가 신앙인들의 고백을 통해 강화되어 갔고, 따라서 “오직 신앙인에 의해서만 알려지고 경험되는” 존재가 되어갔다. 또 이 이해 자체가 점점 힘을 얻어가 결국 “기독교적 기준”의 제일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방식은 칼케돈 신조에서 공언된 ‘예수의 진정한 인성’의 문제와 상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언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를 “신비적인 신인(神人)”으로 이해하는 것은 칼케돈 신학자들의 생동하는 신학적 선언을 순전히 도그마적으로 추상화해 버린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칼케돈 신학자들은 예수의 인성 (humanity) 속에 충만하게 임한 신성(divinity)을 말하고자 하였지, 그 둘의 일치(identity)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인간 예수에게 충만히 임재 하였지만, 예수와 하나님은 구별된다는 이 이해를 어떻게 말/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의 내재(immanence)를 이해할 때, 신의 임재(presence)가 인성을 대치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한 그 동안의 신학적 서술이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부지불식간에) 두 개의 실재는 결코 서로 합생(coalesce)될 수 없다는 실체론적 형이상학의 전제 위에서 신학적 사유를 전개했기 때문이다. 실체론적 사고는 칼케돈 신학자들이 ‘동일본질성’이라는 말로 의도하였던 바를 이해할 수 없다. 오직 양자택일만이 있을 뿐이다. 아리우스의 경우처럼 신성을 약화시키던지 (양자론의 경우), 사벨리우스처럼 인성을 제거하던지 (양태론의 경우).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에 의하면 두 개의 (아니 많은) 실재가 창조적 방식으로 합생하여 새로운 하나의 존재를 지어 간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성은 인간 예수에게 충만히 임하여, 충만한 신성과 충만한 인성을 지닌 새로운 존재 즉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가능케 한다.

칼케돈 신조를 설명 가능한 방식으로 만들기 위해 존 캅은 조금 기술적인 방식을 택한다. 즉 예수는 “로고스 자체 Logos as such)”가 아니라 “성육신한 로고스(Logos as incarnate)”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육신한 로고스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였다”고 말한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 캅은 예수의 유일성 (the unique manifestation of God)이라는 기독론적 고백을 보존해 내려고 한다. 그러나 과정신학의 독특성은 이런 기독론적 고백의 보존에 있지 않다. 오히려, 신의 화육이 역사적 예수에게서만 “배타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이것을 마조리 수하키는 이 세상 자체가 “화육의 세상(an incarnational world)”이라고 표현하였다. 과정 범재신론에서 ‘화육’이란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시발함으로서 그 시원적 배타성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자유만이 아닌 세상의 자유에 의해서 이 세상 속에서 함께 구현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해는 신의 힘과 지식에 대한 과정신학의 새로운 신학적 이해에 기반하고 있다.

5-3. 신의 능력과 지식에 대한 과정신학의 이해

과정신학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이 신의 전능(omnipotence)과 전지(omniscence)라는 개념에 담으려고 했던 정당한 종교적 관심을 부정하지 않는다. 신의 전지전능이란 개념은 신에게 귀속되어야만 할 진리의 확실성과 신이 가진 힘의 탁월성을 설명하려는 신학적 관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정신학은 전통적인 신론이 이러한 종교적 관심을 도그마적인 정식(定式)으로 연결하는 과정에서 적절하지 못한 가정에 의존하였다고 비판한다. 신의 전능이라는 개념은 처음에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동기에서 출발하였을 것이다. “신이 신이 되기 위해선 그 힘에서 모든 것을 능가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사고는 다음과 같은 철학적 추론 즉 신의 힘이 탁월성을 갖는다는 것은 “그 힘이 세상에서 일어날 모든 세부적인 것까지도 결정할 수 있는 힘(all-determining power)”을 의미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마찬가지로 신의 전지(全知)라는 개념도 같은 동기, 신이 신이 되기 위해선 신은 모든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세상의 가능성으로 인해 만들어질 모든 세부적 결과에 대한 것까지도 명확히 알 수 있는 신의 “선지(先知, foreknowledge)”라는 개념으로 정착한다. 하트숀은 이러한 신학적 가정과 추론들이 이루어지는 것은 “신의 절대 불변성 (the complete unchangeability of God)”이라는 초월적 이신론의 철학적 전제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원인(cause)에 의해 변화되지 않는 신 (an immutable God)이라는 전제는 세상의 피드백을 받지 않는 채 일방적인 방식으로만 행사되는 신의 힘이라는 개념을 낳았고, 세상이 만들어 낸 (상대적인) 가치(value)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절대적인 신 (an impassible God)이라는 전제는 미래의 모든 세부적인 것까지도 알 수 있는 신의 지식이라는 개념을 낳았다.

이러한 신학적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다양한 요소의 사상들로 채워져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자기 변화가 없는 신 (the unmoved Mover)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신 개념이 먼저 철학적 기초를 이루고, 신을 유일자(the One)로 이해했던 신플라톤주의적 사고가 “독존적인 실재 (eminently real)”로서의 신과는 전혀 다른 “파생적인 실재 (derivatively real)”로서의 세계를 구분하였을 것이다. 또한 여기에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군주들의 이미지” 그리고 나중에는 “로마 황제의 이미지”가 첨가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고들은 기계론적 존재론이 건재하는 한 설득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만약 세계 안에 있는 존재들이 자기 경험이 없는 기계적인 존재 즉, 화이트헤드가 “공허한 실재들 (vacuous actualities)”라는 표현으로 지칭하는 것들이라면, 세상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모든 세부적인 것들까지 내다볼 수 있는 지식과 모든 것들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신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실체론적 형이상학에 기반한 기계론적 존재론은 사물의 운동을 그렇게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과학적 발견들에 의해서 이러한 기계론적/환원론적 사고방식은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과정신학은 기계론적 방식으로 이해하였던 전지전능의 개념을 재구성하여 현대인의 신앙에 신학적 해답을 주려고 한다. 그것은 과거의 신학에 남아있던 결정론적 사고는 제거하지만, 접두사 ‘전(全, omni)’에 담긴 기본적 함축성은 가능한 한 지켜내려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과정사상의 존재론에 따르면, 세계 혹 자연이라는 집을 짓는 궁극적 단위들은 감각도 없고 목적도 없이 그저 지속되는 실체들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는 주관적 목적 (subjective aim) 혹은 목적인(final cause)을 지닌 “사건 (event)”들로 구성되어 있다. 자기 결정을 하는 작인들(decision-making agents)로 구성된 세계는 따라서 실제적인 창조성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가치는 따라서 각각의 사건들이 만들어내는 “고유한 (intrinsic)” 것들이며, 따라서 신이라 할지라도 세상의 이러한 자유로운 운동을 명령적으로 제어할 수 없다. 그것은 “신의 자기제한 (self-limitation)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명령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의 전능이라는 개념을 지키기 위해서는 신의 힘이 세상에 행사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필요로 할 것이다. 또한 이렇게 세상이 자기창조성을 지닌 것으로 이해된다면, 신의 지식은 세상에서 솟아오르는 새로움 (emergent novelty)에 어느 정도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의 전지(全知)라는 개념은 신의 변화가능성 즉, 새로운 지식의 무한한 축적이라는 사고를 포함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듯 과정사상의 형이상학은 신의 무한성과 영원성과 절대성을 일면적으로 강조해 온 전통적인 신학의 산물인 ‘전지전능’이라는 개념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과정신학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해되었던 신의 전지전능의 개념 즉 선지적(先知的) 전지와 전결적(全決的) 전능이라는 개념을 버리는 것이 꼭 신의 힘과 능력을 제한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역설적으로 말한다. 오히려 반대로 전통적인 전지전능의 개념이 “세상의 가장 작은 것 속에서도 창조성을 길러내는” 신이 지닌 은총의 힘과 “새롭게 떠오르는 것을 신적 삶으로 무한히 편입시키는” 신의 지식을 제한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능, 다시 말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힘은 신이 예상했던 결과를 얻기 위해 세상을 강압(coercion)으로 제압하는 힘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진정한 전능은 세상이 더 고귀한 방식으로 자기실현을 할 수 있도록 설득(persuasion)하는 사랑의 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상응하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지 즉,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지식은 미래를 결정해놓은 항구불변의 선(先)지식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신의 전지(全知)는 세상에 임재하여 얻게 되는 새로운 이해를 다함이 없이 받아들여 형성되는 신의 지식의 무한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과정신학이 제창하는 이 새로운 이해는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을 바라볼 또 하나의 창문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준다고 본다. 그것은 과정 범재신론이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객지에서 빌려온 군주적인 신이 아니라 성서에서 증언되는 창조적이면서 응답적인 신이기 때문이다. 이 신은 탄식하는 피조물의 “위대한 동반자 (the great companion)”이자 “동료 고난자 (the fellow-sufferer)”요, 세상을 “자신의 참과 아름다움과 선함의 이상(理想)으로” 이끌어가는 “세상의 시인 (the poet of the world)”이다.

6. 민중신학과 과정신학의 대화: 민중 메시아론의 종말론적 이해를 중심으로

과정사상의 유기체적 형이상학은 민중의 자기 창조성이라는 개념을 실체론적으로 이해할 때 생기는 문제점들을 극복하고 민중과 하나님의 역동적 관계를 새롭게 조망할 수 있는 철학적 언어를 제공해 준다. 아울러 과정신학의 새로운 기독론적 이해는 민중 메시아론에 쏟아졌던 전통신학의 비판이 실상 이원론적 철학에 근거하여 제기된 오류였다는 안병무의 주장에 협력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중 중심적 관점>과 <그리스도 중심적 관점>이 서로 모순될 수 없다는 안병무의 민중 메시아론의 핵심적 사상을 다룰 신학적 토론의 장으로서 범재신론의 새로운 등장이다. 관계론적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정 범재신론과 민중 메시아론은 일정한 신학적 공통분모를 갖는다. 그러나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사회역사적 해방을 향한 신학적 실천을 중시하는 민중신학과 철학적 보편성과 일관성을 중시하는 과정신학 사이에 놓인 관심 방향의 상이성은 서로에게 도전이 된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민중 메시아론의 ‘종말론 이해’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 종말론은 범재신론으로 재구성 된 종말론이다.

6-1. 기독교 종말론의 특징과 민중신학의 종말론 이해

기독교 신학은 역사적 ‘해방 (liberation)’이라는 개념을 종말론적 ‘구원 (salvation)’이라는 개념과 분리하여 이해하여 왔고, 그 사이를 잇는 가교로서 교회론을 언급하여 왔다. 일반적으로 해방이란 개념은 불확실한 역사의 지평에서 사람들이 이룬 진보를 일컫는 말이요, 구원이란 항상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활동에 바쳐졌다. 이러한 구분은 어쩌면 우리가 역사 속에서 만나는 “모호성들 (ambiguities)”로 인해 정당성을 얻는 듯하다. 우리는 때때로 역사에서 솟아나는 창조적인 진보를 발견하지만, 또한 우리는 “꽃이 마르고 풀이 시듦같이” 그 모든 역사적 진보가 모호해져 버리는 것을 경험한다. 예를 들어 획득된 선함이 영원히 존재하지 못하며, 그 선함이라는 것도 역사적 상대성 속에서 모든 이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보편성과 객관성을 획득한 선함이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은 ‘해방’이라는 말과는 분리된 개념으로 ‘구원’이라는 단어를 빼먹지 않았고, 이 개념을 통해 역사가 향해가는 궁극성을 가리키고 역사에 주어지는 의미의 근원을 추적하려 하였다.

그러나 해방과 구원이 전적으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해방과 구원이라는 이 두 단어는 대체적으로 함께 묶여 기독교 종말론의 건강성을 유지하였고 ‘하나님 나라’라는 신학적 상징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대부분의 건전한 현대의 종말론은 해방과 종말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두 개의 극단적 이해방식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 하나는 전통신학의 이원론적인 모델이요, 다른 하나는 범신론과 무신론의 일원론적 모델이다.

이원론적 전통신학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구원사와 세속사를 분리시켜, 해방과 구원이 서로 만날 수 없게 만들고 말았다. 여기서 전제된 초월적 이신론의 신은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역사에 간섭하다가 때가 이르면 이 문제 많은 세상을 신비적인 완성으로 이끌 것이라고 믿어졌다. 마지막 날에 공평한 심판자로 등장할 이 신은 “양과 염소”를 나누어 천국과 지옥으로 향하게 할 것이라고 또한 믿어졌다. 하나님의 왕/국은 이 세상과 동일한 공간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역사가 깃든 곳과는 전혀 다른 (초자연적인) 곳에 조성되던지 아니면 역사가 휩쓸려 없어진 그곳에 새롭게 세워지던지 할 것으로 믿어졌다. 결국 기독교 종말론은 탈역사화 되고, 구원에 대한 희망은 개인주의화 되며, 역사적 해방은 의미를 갖기 힘든 사소한 것이 되고 말았다. 결국 초월적 하나님이 승리하신 것이 아니라 신론에 깃든 지배 이데올로기가 승리하고 만 것이다. 예를 들어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에 대한 신학적 구분은 곧장 기독교 제국의 신학으로 채용되어 역사적 해방을 향한 ‘사회 정치적 동기’를 거세시키고 저세상을 향한 ‘종교적 동기’로 바꾸고 말았다. 그 결과 종말론적 구원이 역사적 해방과는 단절되고 말았고 오직 교회만이 그 사이를 채울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것은 성서적 종말론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 범신론적 일원론은 형이상학적으로 해방과 구원을 분리시킬 수 없었다. 범신론에서 종말론적인 구원은 역사적 해방으로 내재화되어 용해되어 버림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향한 희망이 의미를 잃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와 자연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분명 범신론은 그 대척점에 있었던 이원론적 전통신학의 위협이 될 법도 했지만, 이원론에 너무 깊이 길들여진 전통신학은 범신론을 대수롭지 않은 감기 정도로 여기고 내 팽개쳤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근대의 무신론은 방황하는 역사의 총아들을 대부분 자기 가슴으로 쓸어 모아가며 전통신학에 맞서기 시작하였다. 양식(良識) 있는 사람들이 이 땅의 지평을 넘어 종말적 구원에 대한 기대를 갖고 교회에 남아있으리라는 전통신학의 오래된 낙관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무신론이 그려내는 역사 내적 이상국은 저세상적 묵시를 빠르게 대체하여 갔다. 그러나 종말적 묵시 (eschatological apocalypse)를 역사적 평면에 모두 옮겨 적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무신론적 일원론이 영원하지 못하였다. 인간의 역사가 지니는 신비는 평면에 담길 수 없는 중층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에 완전히 길들여질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였던 무신론은 자기의 희망보다 더 큰 절망을 자기가 굳게 믿었던 역사의 한 가운데에서 경험하곤 했다. 결국 무신론적 일원성은 전통신학의 이원론에 대한 과도한 반작용인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위와 같은 역사적, 신학적 교훈을 바탕으로 태어난 범재신론은 전통신학의 이원론과 범신론/무신론의 일원론 사이에서 자기가 설 자리를 분별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해방과 구원이 함께 솟구치며 만들어내는 역동적 이원성 (duality)을 신학적 일관성으로 기술해 내는 작업이었다.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모든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지혜가 범재신론이라는 자궁에서 쏟아져 나왔다. 민중 메시아론도 그 중의 하나이다.

민중신학의 종말론은 성서적 종말론의 부활을 의미했다. 성서적 종말론이란 역사적 해방과 종말론적 구원을 분리시키지 않으면서도, 역사 안에서 진행되는 해방이 종말론적 구원을 대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또한 거부하는 성격을 가진다. 성서적 종말론은 역사 안에서 진행되는 “정치적 메시아니즘”의 프로그램을 부정하는 급진적 유일신 사상 (radical monotheism)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구원이 속한 곳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신앙의 본원적 선언이다. 이런 점에서 민중신학의 종말론은 범신론/무신론의 일원론적 모델과는 다르다. 그러나 이것이 구원을 역사로부터 떼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하여 종말론적 구원을 베푸시지 역사를 종말시키고 나서 구원사역을 시작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민중신학의 종말론은 전통신학의 이원론적 종말론과 다르다. 민중신학의 종말론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를 넘어서는 의미론적 상징이면서 동시에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존재론적 실재이기도 하다.

민중신학의 종말론은 민중의 해방이라는 사회역사적 관심 가운데 진행되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실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색보다, 그 종말론적 상징이 사회역사적 상황 속에서 갖는 신학적 ‘의미’에 주목하였다. 여기에는 성서적 종말론을 비역사적, 탈정치적, 개인주의적 믿음(belief)의 문제로 변질시켜 결국 종말론적 희망을 민중의 삶의 상황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전통신학에 대한 강한 비판이 담겨있다. 따라서 안병무는 <하나님 나라>라는 종말론적 상징을 사회역사적 개념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라는 사상은 역사적으로 고난 받는 사람들의 사회적 상황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또 그것이 종말론적 의미를 진정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위로와 희망을 필요로 하는 고난의 사람들을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라는 밭에 심겨진 겨자씨처럼 역사를 통해 자라나는 하나님의 성례전(Sacrament)이다.

민중신학의 종말론에서, 역사적 해방은 종말론적 구원과 분리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일치하지도 않는 개념이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의 것이 아니면서도 역사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신학의 종말론에서, 종말(eschaton)이란 ‘역사 자체’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고 민중의 해방 즉 민중의 ‘고난’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종말이 깊어갈수록 이 역사 안에서 평화(shalom)와 친교(koinonia)는 더욱 자라나게 된다. 이 종말의 과정은 거저 주어지지 않고 고난을 뚫고 일어서는 민중들의 자기해방, 자기초월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레토릭이 어떻게 철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과정신학은 이 문제에 답을 하려고 한다.

6-2. 과정신학 종말론의 형이상학적 구성 : 하나님 나라의 범재신론적 이해

과정신학의 범재신론에서 전통신학이 그려온 전체적인 하나님의 드라마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전통신학에서 하나님의 드라마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o)에서 시작하여 그 창조된 세계가 끝나는 새로운 창조로서의 종말 이야기로 끝난다. 이 신학적 구도에서 볼 때 종말론은 첫 번째 창조가 완전히 제거되는 두 번째 창조의 이야기다. 전통신학이 기초한 철학적 신론과 실체론적 형이상학에 따르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같은 공간을 사용할 수 없다. 따라서 종말의 새 세계는 이 세상을 물리적으로 대체하든지 아니면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에 위치하게 된다. 이 종말론적 왕국은 그 자체의 실체론적 성격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전혀 다른 실체인 이 세상과의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왕국은 다만 신의 결정에 따라 세워질 뿐 피조물의 종말론적 희망에 의해 제기되거나 도래할 수 없다. 그러나 과정신학에 따르면, 전통신학이 그려 온 이 모든 드라마는 잘못된 형이상학에 기초한 것이며, “갈릴리에 기원을 둔 기독교”가 쓴 이야기가 될 수 없다고 주장된다.

만약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라면, 그 나라의 근본성격은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 속에서 또 이 세상를 넘어서 일하시는지에 따라 이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정 범재신론에서 볼 때, 하나님은 (초월적 이신론이 주장하듯) 세상을 떠나서 계시지도 않고, (범신론이 주장하듯) 세상 자체도 아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이해되는 것은 또한 세상 (the world)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화이트헤드는 세상의 특성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먼저, 세상은 “지나가는 그림자(a passing shadow)”와 같은 것이다. 세상은 “끝없이 사멸하는 (perpetually perishing)”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며, 하나님이 없다면 이 세상이 이룩해 놓은 선함(goodness)도 계속해서 상실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 세상은 “최종적 사실 (a final fact)”이기도 하다. 만약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되고 말 뿐이다. 세상은 “최종적 사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세상의 시간 속에 반드시 내재해 계신다고 이해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필연적’ 내재가 하나님의 초월을 해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시간 속에 당신의 거처를 두었지만, 하나님은 세상의 “끝없는 사멸”의 운명을 거슬러 “영원한 (everlasting)” 삶이라는 신의 특성을 갖는다. 만약 하나님의 영원성이 없다면, 이 세상은 자기 창조성으로 만들어놓은 (그러나 영원히 소실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 새로운 것들은 보존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세상은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최종적 사실”이 될 수 있는 것은 세상 자체의 힘에 (혹은 실체론이 말하듯 이 세상 자체의 존재적 영원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성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새로움 또한 “하나님의 이상적인 통찰 (the ideal vision of God)”에 기대고 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는 이렇게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나선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자기 창조성을 지닌 이 세상을 떠나선 세상에 대한 신적 의미의 근거인 이상적인 통찰이라는 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과 세상이 이러한 상관관계를 갖는다면, <하나님‘의’ 나라> 또한 이 세상과 같은 상관성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정사상에서는 (전통신학이 말하듯이) 이 세계가 사멸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불가능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관계 안에 있다. 이 관계 속에서 모든 존재는 과거에 “빚을 지고 (indebted)” 있지만, 또한 자신의 창조성으로 부단히 전진해 나아간다. <하나님의 나라> 또한 이 빚짐의 관계에서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과는 다르게 특징짓게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찾아질 수 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보존하면서 당신의 이상적인 비전을 제공하시듯, <하나님의 나라> 또한 이 세상과 상관성(mutuality)을 맺으면서 하나님의 비전을 영원히 이루어가는 가운데 이 세상을 변화시켜가는 것이다. 따라서 과정신학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자체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나라는 “이 세상 안에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을 변화시켜 궁극적인 구원으로 인도해가는 것으로서, 어쩌면 하나님의 왕국(Kingdom)이나, 천국(Kingdom of Heaven)이나, 하나님의 도성 (the city of God)이라는 것보다 “하나님의 다스림 (the Reign of God)”이라는 표현에 적합할 것이다. 이 하나님의 ‘다스림’은 악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기독교 종말론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난/고통의 문제에 대한 신학적 응답이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악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라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과정사상에서 그려지는 세상은 “무한과 유한, 생성과 소멸, 새로움과 역사적 조건에 갇혀 생긴 고통, 이러한 것들이 서로 결합(fusion)”되어 존재한다. 이러한 짝들 간의 “끝없는 진동 (perpetual oscillation)”은 선과 악을 동시에 발생시킨다. 하나님은 세상과 관계를 맺으며, 선 뿐만 아니라 악에 대해서도 응답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선과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지만, 이것은 “악으로부터 선을 분리시켜 내는 것 (isolation)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겨내는 것 (overcoming)”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도래(advent)”는 동시에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모험(adventure)”이기도 하다. 악은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생겨나지만, 그러나 악의 종말에 대한 희망이 있다. 그것은 구원의 하나님이 당신의 영원한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함”의 비전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험을 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은 이 하나님[의 비전]을 자기 안에 체현(incarnation)시켜 감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6-3. 민중신학의 관계론적 종말론 : 이원론과 실체론을 넘어서

민중신학의 종말론은 종말론적 철학을 강조하기보다 종말론적 윤리를 강조해 왔다. 이 윤리적 종말론은 종말론적 신앙이 형성된 사회역사적 삶의 자리와 그 삶 속에서 가져야 할 신앙의 책임성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전통신학의 이원론적 종말론에 의해 불구가 되어버린 성서적 종말론의 회복이었다. 성서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지배계급의 힘의 통치를 유지하게 하는 하나님의 승인이 아니요,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반(反)문화적인(countercultural)” 특징을 가졌고, “종교와 정치가 연합된” 개념이자 “제국주의의 지배와 식민지의 착취”의 상황이 고려된 개념이었다.

그러나 전통신학의 이원론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의 삶과 분리시켜버렸고,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희망에서 역사적 해방의 요소를 제거했으며, 신앙의 희망이 저 세상을 향하도록 바꾸어놓아 역사적 책임성을 상실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이 이원론적 종말론은 결국 기독교 종말론이 지향해야 할 바를 배반하도록 이끌었다. 이 이원론의 폐해는 종말론에 그치지 않고 기독교적 사고와 행동의 전 영역에 미쳐 결국 삶을 병들게 했다. 오랜 기간 동안 기독교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속(俗)과 성(聖)을, 정치와 기도를, 세상과 교회를, 시간과 영원을, 몸과 영혼을, 땅과 하늘을, 휴머니즘과 신비주의를,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정의와 사랑을, 수평주의와 수직주의”를 구분하는 이원론을 탐닉하였다. 이것은 “너무나 큰 오류 (the great Fallacy)”였다.

따라서 민중신학이 자신의 종말론에서 역사적 해방과 종말적 구원을 비이원론적으로 이해하였던 것은 중요한 신학적 성과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 비이원론적 이해를 일관된 철학적 틀에 담아 설득력 있게 전달할 것인지는 민중신학에 아직 남아있는 과제라고 보여진다. 그런 의미에서 민중신학이 <하나님 나라>라는 종말론적 상징 속에 담긴 해방과 구원의 역동적 관계를 밝히는 ‘신학적’ 작업에서 과정사상의 관계론적 철학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매우 생산적인 방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종말론의 ‘신학화’ 작업이라는 것은 항상 한계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종말의 구원이란 항상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따라서 우리에게 그것은 “지식의 영역에 있기보다는 희망의 영역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한편, 우리의 희망이라는 것도 우리의 지식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더 타당하고 일관된 체계를 이루어야하는 신학적 과제로 되돌아오게 된다.

과정신학과의 대화에서 민중신학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실체론적 철학의 문제를 극복하고 범재신론이란 드넓은 신학적 지평을 열어가는 해석학적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서 민중 메시아론이 기독론적 비판을 받고 어려움을 겪었었던 점에서 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신학적 사유의 토대로서의 범재신론 즉, 하나님과 세계/민중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을 확립해야 한다는 신학적 요청이다. 이것은 이원론의 극복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 작업 역시 실체론적 형이상학의 극복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과제이다. 실체론적 형이상학이 극복된 범재신론은 관계론적 신학을 가능케 하는 기독교 세계관이요, 이 위에서 우리는 신학적 이원론과 기계론적 존재론, 운명론적 구원론과 결정론적 종말론, 타계적 신앙론과 개인주의적 윤리론을 동시에 넘어설 수 있는 일관된 지혜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미 민중신학이 자신의 창고 안에 보관해 온 여러 구슬들을 꿰어 보물로 만드는 작업이기도 하다.

정리하는 말

이 논문은 민중 메시아론을 위한 신학적 변론으로 시작하였다. 이 변론적 과제는 어쩌면 안병무의 고민을 이어가는 작업이었는지도 모른다. 안병무는 자신의 책 [민중신학 이야기]에서 민중예수를 오클로스와의 관계성 속에서 해석으면서도 마지막 부분에서 “언어의 부족”을 호소하며 마쳤다. 무엇이 도대체 부족하였다는 말인가? 민중신학은 민중의 고난과 희망에 답을 하기 위하여 전통신학을 재해석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신학적 전통에서 간직되었던 ‘신앙’의 문제를 통째로 내다버리고 새로운 인간론적 신학을 기획하려 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어떻게 구원의 하나님과 민중의 해방이란 주제를 연결할 것인가 하는 중심 화두를 붙들었을 뿐이다. 민중 메시아론이 과거에 기독론적 비판을 받았던 것은 민중신학의 문제였다기 보다는 전통신학의 문제였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전통신학에서 하나님과 역사의 관계는 주로 성령론을 통하여 또 부분적으로 신론을 통하여 서술되었지만, 기독론은 완고한 이원론에 머물러 있으면서 ‘믿음’만을 강요하였다. 성령론에서 민중신학을 서술하면 전통신학과 마찰이 줄어드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고 본다. 전통 기독론의 완고한 이원론, 이것이 민중 메시아론이 대화에서 어려움을 겪는 뿌리였다. 안병무의 고민과 “언어의 부족”이란 호소는 이러한 상황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이 논문은 민중 기독론을 곧장 구축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민중 메시아론에 대한 과거 기독론적 비판이 지닌 신학적 문제를 밝히는 작업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몰트만과 대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곧장 범재신론이라는 주제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것은 난감한 문제에 대한 신학적 회피가 아니다. 신론이란 신학적 세계관이요, 이 세계관적 토대가 마련되었을 때 비로소 기독론적 토론도 이원론에 좌우되지 않고 논의될 수 있다. 또 이러한 전환은 민중 메시아론 자체가 민중을 (전통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로 고백하자는 것이 아니었고 대신 민중의 자기 초월성과 하나님의 구원활동의 불가분리성을 다루려는 사상이었다는 점에서 정당하다고 여겨진다. 민중 메시아론은 분명 범재신론의 시각에서 조망되어야지 그 뜻이 완전하게 드러나는 민중신학의 핵심 사상이다.

민중신학이 신학적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신학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구축하는 작업에 소홀하였다는 점은 어쩌면 과거 7,80년대에는 시대적 요청이자 상황적 한계였다고 이해될 수 있겠지만, 오늘날 우리의 21세기 신학에는 바람직한 현상이라 인정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민중신학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길은 여러 개가 있을 것이다. 또 형이상학이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된다지만, 그것만으로 학문의 필요충분성을 모두 채우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실체론적 형이상학과 이원론적 신학적 구도에 기반한 전통신학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시도하는 신학이 있다면 한 번 정도 과정신학에 빚지는 것도 유익한 일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과정신학은 오랜 기간 동안 이 신학적 과제를 충실하게 수행해 왔고, 또 많은 결실을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민중 메시아론의 뜻을 더 포괄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과정신학과의 대화를 시도하였다. 한국적 신학으로서 민중신학이 풍요롭게 되는데 보탬이 된다면 그 지혜를 어디 서양에서라도 빌려올 수 없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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