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빼미의 밥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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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의 밥상 ::
나름 애쓴 책인데, 처음 발견한 것이 오타네요. 아우구스티누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써버렸네요. 책이 잘 팔려서 재판을 찍게 된다면 교정할 수 있지만, 자칫하면 이 치명적인 실수를 영원히 고치지 못할 수도 있어 걱정입니다.
아래는 이 책의 보도자료로 쓴 소개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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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부팅 바울
권리 없는 자들의 신학을 위하여
‘낯선 바울’ 읽기, 바울을 리부팅하다
가톨릭의 아우구스티누스, 프로테스탄트의 마르틴 루터,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 칼 바르트, 그리스도교 신학의 제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세 사람의 신학은 바울 해석을 토대로 하고 있다. 성서 자체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제2성서(신약성서) 27개 텍스트 가운데 13개가 바울의 이름으로 된 문서다. 이는 1세기 말경에 이미 그리스도의 공동체들 사이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서는 다름 아닌 바울의 문서였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고대에서 현대까지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바울의 시선에 의해 규율된 역사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역사적 그리스도교에 비판적 문제를 제기했던 많은 이들은 대개 바울을 비판했다.니체는 바울이 예수를 교회의 도그마로 왜곡, 전락시킨 장본인으로 보았고, 자유주의 신학자 아돌프 폰 하르낙은 바울이 기독교 신앙을 왜곡한 정통주의의 원흉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신학자 루이제 쇼트로프는 바울을 남성 쇼비니스트라고 비판했으며, 민중신학자 안병무도 김창락의 바울 연구를 접하기 전, 바울에 대해 강한 비판을 가했다.
하지만 역사적 그리스도교에 대해 비판적임에도 바울을 다시 주목하려는 시도들도 있다. 그런 시선들은 역사적 그리스도교에 의해 바울이 왜곡되었음을 문제제기하고 바울을 재해석하고자 한다. 최근 가장 주목받는 비판적 성서학 연구자의 하나인 도미니크 크로산도 그중 하나고, 대표적 급진주의 성서학자들인 리처드 호슬리나 닐 엘리엇, 그리고 퀴어신학의 개척자이자 이론신학의 대가인 테드 제닝스 등도 그런 예에 속한다. 그밖에도 무수한 비판적 신학자들이 교회에 의해 왜곡된 바울과는 ‘다른 바울’을 얘기한다. 그들만이 아니다. 세계적인 좌파 사상가들인 알랭 바디우, 조르지오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 등도 바울을 재해석하였다.
한편 민중신학도 바울에 대한 재해석의 대열에 가담했는데, 그 대표적 학자는 김창락이다. 바울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안병무도 제자인 김창락의 연구에 영향을 받아 바울을 재평가하였다.하지만 김창락의 연구는 신학계와 교회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함으로써 그 가치가 간과되었다.
지은이 김진호는 김창락의 바울 재해석을 계승하고 있는데, 그는 김창락의 바울 재해석이 기존의 주류 그리스도교의 바울 이해나, 그리스도교 비판가들의 바울 비판, 그리고 바울을 재해석하고자 했던 여러 논의들을 ‘리부팅’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김창락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바울의 현장신학적 관점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바울에 대한 대개의 재해석들은 바울을 로마제국 전체와의 대결구도 속에서 보고자 했다. 그것은 고전적인 바울 연구들이 바울을 유대교와의 대립구도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관점이다. 한데 이런 논쟁은 모두 바울의 서신들이 담고 있는 투쟁현장을 제대로 조명하지 못했다. 반면 김창락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부의 기득권자들인 유대인들에 대해 비기득권자들인 이방인을 옹호하려는 것이 바울의 투쟁현장임을 밝혀낸 것이다.
김진호는 김창락을 계승하면서도 그가 입증하는 데 실패한 현장의 사회사적 맥락을 밝힌다.그리고 그런 논의의 연장에서 김창락의 관점을 수정한다. 바울의 현장은 지중해 지역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부가 아니라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사회이며, 그 안에서 비기득권자인 이방인은 주로 개종해 들어온 해방노예들임을 주장한다. 이들은 고대적 세계화가 한창 진행되던 1세기 지중해 지역의 독특한 사회사적 상황에서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아 이리저리 떠도는 유민이 된 자들이다. 한데 도시의 지배층과 시민층, 그리고 서민들은 이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 심지어는 증오를 쏟아냈다.
이스라엘 교포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그곳에서 순혈주의적이고 배제주의적인 근본주의적 이스라엘 종파인 유대주의가 거세게 물결쳤다. 한데 바울은 그런 현장 한 가운데서 이들을 옹호하고, 이들에 대한 배제의 논리를 공박하였다. 김진호가 재해석한 바울의 현장과 그의 담론투쟁은 이랬다.
이렇게 김진호는 고전적인 바울 해석과 최근의 바울 재해석을 리부팅하는 김창락의 견해를 계승 보완하면서, 1세기 지중해 지역 대도시들 한 가운데서 활동했던 바울이라는 인물을 읽는다. 이는 지금까지의 연구사에서 다뤄지지 않은 ‘낯선 바울’의 이야기이다.
고대사회의 인권선언, 바울의 의인론 / 고대의 급진적 인권운동가, 바울
김진호는 이 책에서 바울과 기독교를 동일시하도록 전개되었던 기독교의 바울 수용사를 접고, ‘기독교 이전’의 바울, 곧 기독교가 아직 세상에 존재하기 전에 실존했던 인물 바울의 활동을 현장신학적 관점에서 들여다봤다. 바울의 현장 이해에 핵심적인 논점은 ‘유대주의’ 문제다.바울은 거의 모든 곳에서 유대주의자들과 심각한 갈등을 벌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모든 연구는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의 신앙을 ‘유대교’라고 명명했다. 김진호는 이를 현대 시오니즘의 유대 중심적 관점에 의해 과거의 역사가 만들어진 결과라고 보았고, 이를 바로잡아 ‘이스라엘 종교’라고 썼다. 그리고 다양한 이스라엘 종교 현상과 운동들이 공존하는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사회에서, 안식일과 절기의 준수, 할례 등을 주장함으로써 순혈주의적이고 남성 중심주의적인 방식으로 이스라엘 종교를 재해석하려는 집단을 ‘유대주의자’라고 불렀다.
이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에 의하면) 회당 사회 주변부 대중, 곧 대개가 개종자들인, 특히 버림받은 노예들인 민중에 대해 배타적이다. 이러한 유대주의자의 담론의 효과를 잘 이해하지 못한 많은 이들, 심지어 베드로나 야고보같이 예루살렘계 그리스도파의 유력한 지도자들조차 이러한 운동에 동조하곤 했다. 바울의 전향은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의 개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이스라엘 신앙에 속한 사람으로 유대주의자의 일원이었다가 그 반대편의 지형으로 생각과 실천의 축을 옮겨간 정치적인 전선의 이동을 뜻한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의 담론에 대항하면서 성적, 인종적, 계급적 민중담론을 폈다. 바울의 의인론은 바로 이런 투쟁의 무기로 제기된 신학적 언술이다. 다음은 투쟁교설로서의 의인론의 사회사적 해석이다.
바울이 활동하던 기원후 1세기 중반은 해안지역 노동자의 30퍼센트에 달하던 노예경제가 붕괴되고 무수한 노예들이 속속 방출되던 시기였다. 신분은 노예인데 소유주가 없는 이러한 방출 노예들은 마치 유기견과 같은 존재가 되어 생존의 정글 속에 내던져진 ‘말하는 짐승’에 다름 아니었다. 이들 방출 노예들은 도시의 하층 노동시장을 크게 교란시켰고, 이는 방출 노예들에 대한 사회적 증오와 적대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혈통으로도 피부색으로도 언어로도 어느 하나 동질감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로 들끓는 도시, 이곳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을 보호해줄 사적 연줄을 만들었고, 해방노예나 난민 등 하층민들은 그 연줄망의 변두리에라도 속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이런 맥락에서 로마제국 내에서 사법권, 제의 준수권, 조세 징수권 등 특권을 누리는 격조 있는 결사체, 즉 도시 사회 속의 또 하나의 사회로 기능하는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결사체에 속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렇게 이스라엘 자치 결사체에 편입된 비이스라엘계 사람들에는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테오세비오스, 즉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고 다른 한 부류는 개종자다. 비록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자치결사체를 위해 많은 기부금을 내고 지역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여 이스라엘 교포사회를 보호하였던 이들인 테오세비오스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교포 사회에서 별 반감이 없었다. 그러나 기부금을 낼 처지도 못 되고 품격도 갖추지 못한 개종자는 순혈주의적이고 배타성이 강한 유대주의자들에 의해 ‘이방인’ 또는 ‘헬라인’으로 불리며 하위주체로 대상화되었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에서 의인론을 편다.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서라고 하며, 그 은혜의 대상에 대해서 “이스라엘인뿐 아니라 헬라인(이방인)도,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자유인뿐 아니라 노예도 ‘차별이 없이’ 의롭다고 인정해준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주권이 박탈된 하위주체 모두를 은혜의 공간으로 호출하는 선언이다. 그리하여 권력 없고 소외받던 이들을 재주체화하는 신학담론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의인론은 권리 없는 자들을 위한 신학, 즉 ‘인권으로서의 신학’이다.
2013년 서울, 바울을 호출하다
지구화 시대 세계는 무수한 유민과 난민들로 들끓고 있다. 그들 가운데 대다수는 최소한의 특권도 갖지 못한 쓰레기가 되어 버린 사람들이다. 사회는 그들을 더러운 자, 처분해 버려야 할 자들로 간주한다. 하여 그들은 배제와 차별, 증오가 혐오의 대상이 된 자들이다.
1세기 지중해 연안의 바울의 세계들도 그랬다. 기원전 3세기 이후 국제무역이 전례 없이 활발해졌고, 지중해 전역을 차지하려는 제국들의 전쟁이 잇따랐다. 그 과정에서 종족국가 단위를 훌쩍 넘어 지중해 전역을 단위로 하는 문화적, 종교적, 인구적 혼합 현상이 극심해졌다. 무엇보다도 유민과 난민의 행렬은 지중해 지역 대도시들을 혼융성(하이브리디티)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한데 지중해의 기원후 1세기는 고대적 지구화의 양상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팍스로마나 선언 이후 해안 지역 노동인구의 30%를 차지하던 노예경제가 빠른 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는 무수한 노예들이 방출되었음을 의미한다. 유기견과 같은 존재인 이들이 결국 몰려든 곳은 해안도시들이었다. 이곳에서 이들 부유하는 방출노예들은 가장 심각한 차별과 배제의 대상,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었다.
하여 김진호는 1세기 활동가인 바울을 21세기 서울로 불러내 읽는다. 바울이 활동한 도시들, 특히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등과 21세기 도시 서울은 많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민중 혐오적 양상에 있어서도 양자는 닮은꼴이다. 도시국가 서울이 ‘21세기적’으로 지구화하고 있는 세계의 ‘주변부 메트로폴리탄’이라면 바울의 도시들은 ‘1세기적’으로 지구화하던 세계의 ‘주변부 메트로폴리탄’이었다. 돌진적 근대화로 치닫던 1970-80년대 한국의 도시와 농촌의 개념과는 달리, 농촌의 독자성이 거의 괴멸되어가는, 서울에 귀속된 부속도시들과 촌락들로 이루어진 도시국가 서울, 여기가 지은이가 바울을 묻는 시공간이 된다.
교회 안에서 교회를 개혁하고, 교회 밖에서 배척된 이들을 이웃으로 삼는 일에 몸 사리지 않는 ‘서울의 바울’을 찾아내고 그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지은이가 이 책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이다.
Posted by 망원올빼미
기독교사상 2013년 8월호 특집 <왜, 다시 1903년인가?>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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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대부흥운동, 새로운 기억의 계보를 찾아서
실패한 2007 년의 ‘어게인 1907’, 비판과 대안
실패한 기억하기
2007년을 꽤나 소란스럽게 했던 ‘어게인 1907’의 슬로건은 그 해가 지난 뒤 거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졌다. 물론 일부 대형교회들이 주도했던 이 소란스런 횡보는 큰 성과를 올렸다. 그해 12월 19일에 벌어진 제17대 대선에서 기독교도들의 몰표가 MB에게 집중되었고, 결국 ‘장로대통령’을 당선시켰다. 10년 동안 2회에 걸친 중도개혁정권의 집권으로 전통적 기득권 세력의 권력은 상당부분 위협을 받았고, 일부는 신흥 기득권 세력에게로 지분을 빼앗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 더 계속된다면 전통적 권력의 자원 우위 상황은 역전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했다. 그런데 대형교회가 주도한 보수대연합이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았다. 게다가 새로 집권한 정부는 시작부터 처절한 ‘복수의 정치’를 감행했고, 그 과녁은 신흥기득권세력에 맞추어져 있었다.
권력과 자원의 점유를 둘러싼 정치게임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전통적 보수세력에게는 ‘성공’이라고 평가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일등공신인 교회에게 그것은 그다지 성공이라고 평가할만하지 못하다. 이미 1990년대 초부터 급격히 둔화된 성장세는, 2005년의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지난 10년 사이(1996~2005년)에 개신교의 성장이 마이너스 상황에 진입했다. 불과 1.4%라는 소폭의 감소였지만, 1960~1990년 대부흥기에 워낙 초고속의 성장을 거듭하던 직후의 급격한 반전이었기에 그 타격은 꽤나 심각했다.
무엇보다도 교세의 초고속 성장에 맞추어져 있던 목사후보생 양성 시스템이 파행으로 치달았다. 이 과정에서 세계를 분석하고 미래를 기획할 신학의 기능은 퇴화되었고, 성장을 위한 기능학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지구화 시대를 맞아 세계의 변화 속도(velocity)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빨라졌고, 그중에서도 한국의 변화는 더욱 무시무시하게 과속으로(speedily) 달음질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 시기에 미국발 수입신학인 성장 기능학의 효과는 기대 이하로 미미했다.일부의 예외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교회는 성장하지 않았고, 양극화는 극적으로 악화되었으며, 심지어 매년 문을 닫는 교회가 1,300여개나 되었다. 이것은 교회 매매를 둘러싼 ‘블랙마켓’의 극적인 비대화를 초래했고, 여기서 온갖 추문들이 시민사회로 여과 없이 유포되었다.
가뜩이나 교회에 대한 시민사회의 시선이 따갑던 때였다. 2천 년대 초부터 미국의 부시정권이 명분 없는 전쟁을 벌이면서 전 세계에 반미가 물결치고 있었고, 특히 가장 친미의 공간인 한국에서도 반미는 시민사회의 다수 견해가 되고 있었다. 이때 한국의 개신교는 부시의 종교와 동색(同色)이라는 혐오적인 이미지로 싸잡아서 비판받았고, 실제로 대형교회 중심의 개신교 지도자들이 부시의 전쟁을 ‘정의의 전쟁’이라고 소리높이고 있었으니 시민사회의 그런 시선은 크게 보다 틀리지 않았다.
거기에 한국의 근본주의적 개신교도들의 공격적 선교, 그것의 파행성이 전 세계적으로 탄로되었다. 이에 국외에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공격의 표적이 되었고, 국내에선 불교계가 중심이 되는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안티기독교운동이 활발해졌고, 과학주의자들의 도전 또한 거셌다.
이런 추세와 맞물려 개신교 신자들의 교회에 대한 충성심은 현저히 낮아졌고, 목사나 장로 등 교회의 엘리트 집단에 속하는 이들조차 대외적으로 자신의 종교성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하는 경향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신앙적 자존성이 크게 추락했던 것이다.
‘어게인 1907’이 드높이 울려 퍼지게 된 것은 바로 그때다. 그 해는, 말했듯이, 대선이 있던 때였고 마침 장로대통령 후보가 유력하게 떠오르던 때였다. 또한 그 해는 평양 대부흥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하여 위기 타개를 위한 전환점으로 삼기에 2007년은 꼭 알맞은 해였다. 그리고 말했듯이 개신교가 몰표를 주며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는 개가를 이룬 것이다.
한데 그럼에도 이후 교세는 전혀 반전되지 않았고, 교회 양극화는 훨씬 더 심화되었으며, 시민사회의 혐오 현상은 단순한 감정적 반대에서 체계적인 반대로 비약하고 있는 추세다. 그리고 개신교 신자들의 충성심 이완 현상은, 다중 종교성(multiplexization of faith)을 드러내는 멀티신자 현상을 부추겼다. 최근 일부 신학자들이 주목한 ‘가나안 성도’에 대한 연구는 바로 이런 다중 종교성 현상을 해석하는 실마리를 담고 있다. 충성심 이완이라는 신앙적 자존성의 해체 현상이 탈교회적 종교성(dechurched religiosity)으로 재신념화되고 있는 것이다.
하여 2007년을 소란스럽게 했던 ‘어게인 1907’이라는 구호는 한국 개신교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반전시키는 데 거의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심지어 개신교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고, 오히려 반개신교적 담론을 더욱 체계화하도록 자극하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그런 점에서 최근 감리교를 중심으로 조용히 불고 있는 ‘1903년 원산 대부흥’의 기억하기는 ‘1907년 기억의 소환 작업’의 실패를 반추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실제로 1903년 원산의 대부흥은 ‘헤게모니화 과정’을 수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권력게임에 과도하게 집착했던 1907년의 기억과는 처음부터 차별화된 지점을 보여준다. 바로 이 점이 내가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어게인 1907’의 실패한 기억 운동의 요체다.
1907년 기억의 두 요소
우선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원기억(原記憶)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흔히 평양 대부흥운동을 얘기할 때 많은 이들은 1903년의 원산 대부흥운동을 떠올리곤 한다. 한데 그것은 ‘해석의 주체’가 기억을 서사화할 때 즉 기억의 주체가 원산과 평양을 기억의 계보로 만들 때 소환되는 선행적 기억의 요소가 원산 대부흥운동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데 원기억은 해석의 주체가 기억을 서사화하기 이전, 즉 기억하기가 작동하기 이전에 기억의 요소가 형성되는 체험에 관한 것이다.
나는 그들 평양 대부흥운동의 기억을 처음 발생시킨 이들 배후에 놓인 체험의 근저에 ‘러일전쟁’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즉 인천을 통해 육로로 진군하던 일본군의 군대폭력을 피해 많은 사람들은 교회로 피신해 들어왔다. 특히 평양의 교회는 일본으로선 침범할 수 없는 ‘미국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러일전쟁의 기억 배후에는 그 10년 전에 벌어졌던 청일전쟁의 기억이 있다. 그때 전쟁터가 되었던 평안도의 조선 양민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했다. 그리고 러일전쟁 당시에도 조선 양민은 적지 않은 고통을 겪었음이 최근의 연구에서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하여 1907년의 평양은 ‘전후’라는 파행적 체험이 응축된 시공간이다. 전쟁을 겪은 뒤, 그 미친 불꽃을 방사시켰던 폭력성이 일상화되고 내면으로 들어가면서 벌어진 몸과 정신의 분열적 갈등이 고조된 시공간이고, 그것이 원인불명의 파괴적 징후로 신체 외부로 돌출하여 발현되는 파생적 폭력의 시공간이다.
특히 갑자기 신자들이 늘어난 평양의 장로교 교회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새로운 신자대중 간에 벌어진 이러한 증오와 분열, 폭력성을 이해하지도 겪어내지도 못했다. 하여 그들은 골방에 들어가 기도회를 갖는다. 위기에 대해 이런 신앙적 행위 양식이 선택된 직접적 계기는 아마도 1903년의 원산의 사례를 전수받은 탓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공교롭게도 이 기도회는 곧 신비 체험에 휩싸인다. 이 기도회 참석자들 다수가 자신들이 겪고 있던 혼돈과 무력함을 단박에 사라지게 하고도 남을 만큼의 종교적 엑스타시 상태에 진입한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열광주의는 순식간에 다른 이들에게 전염된다. 즉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그런 종교적 엑스타시 체험에 몰입하게 되어, 이들은 모두 신비를 공유한 체험공동체로 결속하게 되었다. 아울러 그 신비체험은 전후의 정체 모를 퇴행적인 파괴성에서 자유로워지는 해방의 체험으로 이어진다. 여기까지가 바로 평양대부흥운동의 원기억이다.
이제 기억하기의 두 번째 차원, 곧 본격적인 기억하기, 기억의 제도화 과정을 보자.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신비 체험을 ‘성령의 체험’이라고 명명했다. 하여 이 사건은 성령사건이 된다. 사건의 해석이 시작된 것이다. 한데 해석은 늘 여러 해석들과의 경합 과정을 통해 수행된다.
가령 예수가 악령을 추방한 사건을 바리사이는 악령이 벌인 사건으로 해석했다. 반면 예수는 악령이 악령을 추방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논거를 제시하며 자신의 사건이야말로 성령의 사건임을 강변한다. 여러 다른 해석들이 경합을 하는 가운데, 한 해석이 경쟁에서 승리하면 그것은 지배적 기억으로 자리잡게 된다.
한데 흥미로운 것은, 평양의 장로교 교회들에서 해석의 주도권을 장악한 이들은 교회의 지배층인 미국계 선교사들과 그들을 추종한 한국인 지도자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기도회를 시작했으니, 기도회의 효과를 선점하고 통제권을 쥐게 된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영의 체험은 기존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종교적 전복의 코드가 되곤 했다. 해서 학식 있는 자나 제의권을 독점한 자들보다 그런 일상의 체계를 해석하는 언어를 보유하지 못한 이들이 더 자주 영의 체험을 했고, 그 체험은 그들이 비록 교육받지 못한 이들이라 하더라도 어느 기성의 지도자들 못지않은 담론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1907년의 평양의 교회에선 학식과 제의권을 전유한 이들이 영의 체험도 전유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견제받지 않는 압도적인 신앙적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게 했다.
문제는 당시 평양의 미국인 선교사들이 이른바 ‘맥코믹 네트워크’의 일원, 즉 나이아가라 무디 부흥운동의 열정을 가지고 시카고의 맥코믹 신학대학에서 신학과 선교비전을 전수받은, 당대 미국에서 가장 근본주의적인 신앙의 수호자들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들이 전권을 쥐게 된 이 사건의 해석이 어떤 편향을 띠게 되었는지를 의미한다. 결론을 얘기하면 종교적 문화적 배타성과 성공주의가 결합된 해석이 평양대부흥운동의 지배적 기억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그리고 이것은 이후 목사 후보자의 선발과 양성에 관한 일체의 신학제도를 독점하는 관행과 제도를 낳았다.
정리하면,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에는 원기억과 제도화된 기억, 이 두 가지 기억이 함축되어 있다. ‘원기억’은 신비 체험 현상이며, 그 속에는 ‘전후’라는 파행적 기억이, 그 발작을 일으키는 정체 모르는 미친 상흔들(trauma)이 신비 체험에 의해 압도되어 해소되고 극복되는 ‘해방의 체험’이 들어 있다. 또한 그것으로 그들은 이웃을 적으로 환치시켜 그들에게 쏟아 부었던 폭력성을 속죄하고, 이웃을 그리스도의 새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관계적 체험’이 들어 있다.
바로 이 원기억이 제도화되는 과정, 곧 다른 해석들을 압도하고 하나의 해석이 주도권을 갖게 되는 일종의 헤게모니화 과정과 결과가 바로 ‘제도화된 기억’이다. 한데 평양 대부흥운동에서 제도화된 기억은 부모의 전통과 단절하고 신앙을 달리하는 이웃을 적대시하게 하는 배타주의적인 해석의 제도화를 포함했다. 또한 그 배타성의 근거를 서구 백인 남성 중심주의적 가치 친화적인 원리에 종속시키는 식민주의적 해석의 제도화를 포함했다.
이렇게 원기억과 제도화된 기억은 서로 연계된 것이지만, 또한 동시에 이질적인 차원을 갖는다. 이 글에서 나는 그 연계성을 과소해석했고 그 이질성을 과대해석했다. 그것은 2007년의 슬로건인 ‘어게인 1907’의 기억하기의 실패가 저 1907년의 제도화된 기억을 무비판적으로 반복한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에서 이야기할 새로운 기억하기의 가능성을 원기억의 다른 계보에서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억의 계보
2007년의 ‘어게인 1907’은, 1907년의 제도적 기억이 바로 그랬던 것처럼, 교회로 하여금 그 신앙의 배타성과 식민주의를 청산하는 대신, 교회의 권력 지향적 패권주의를 위해 신앙적 재활의 열정을 쏟아 붓게 했다. 그해 전국 곳곳에서, 심지어는 한인교회가 세워졌거나 한국인 선교사들이 활동하는 세계 곳곳에서, 그곳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의식을 치루는 캠페인이 벌어졌다. 그런 종교의례 중에 가장 위험스런 것은 이른바 ‘성시화’ 의례다. 왜냐면 그것을 주도한 이들이 그 도시의 시장, 고위관료, 기업인 같은 그 지역에서 자원을 독과점하고 있는 권력엘리트이기 때문이다.
그런 신앙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이가 바로 제17대 대통령이 된 이명박 씨다. 그는 서울시 시장이던 때나 대통령이던 때, 인사와 정책의 종교 편향성이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그 결과 교회에 대한 사회적 혐오감은 더욱 심화되었고, 정치에 관여했던 많은 기독교 인사들은 더욱 비소통적이고 부패한 권력을 행사했다.
말했듯이 이런 ‘어게인 1907’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하여 이제 우리는 평양 대부흥운동의 기억을 청산의 대상으로 삼아 ‘기억 추방’을 도모할 것인가 아니면 거기에서 새로운 기억의 계보를 발견할 것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나는 앞서 얘기한 것처럼, 기억추방보다는, 원기억에서 새로운 기억의 가능성을 말하고자 한다.
1980년대 말 이후 한국사회는 소비사회로 빠르게 전환되기 시작했다. 소비사회는 사람들을 취향에 따라 개별화한다. 즉 사람들은 남들과 다른 자기 취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구매하는 자가 됨으로써 보다 완전한 시민이 되는 것이다.
한데 이런 상황은 1997년을 거치면서 극단적으로 강화된다. 사람들이 모두가 서로 경쟁자가 되어야만 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승자에게는 엄청난 보상이 선사되고 패자에게는 무자비한 징벌이 부과되었다. 그 무렵 사회를 풍미했던 ‘부자되기 열풍’은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최후까지 살아남는 자의 미덕에 탐닉했고 그것을 위해 몸을 불사르도록 책동시켰다.
한데 그런 서바이벌 게임의 판타지가 무너지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한국계 독일의 사상가 한병철 씨가 말한 것처럼 적극적으로 몸을 불사르며 열정을 다해 달리던 사람들 누구도 서바이벌 게임의 승자가 되지 못했다. 그들이 얻은 것은 피로증후군 같은 신체와 정신의 질병이었다. 게다가 한병철 씨가 생각 못했던 현상도 일어났다. 서바이벌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보다 그런 게임에서 일찍이 퇴출되어 자신을 불태울 노동의 현장 자체가 없는 이들이 한병철이 얘기한 피로증후군에 해당하는 스트레스 증상을 더욱 더욱 심각하게 앓고 있다.
한데 이런 스트레스 증후군은 많은 경우 분노를 일상화한다. 이 분노는, 마치 1907년의 ‘전후’처럼, 이유도 근거도 없이 타자를 향해 퍼부어진다. 일상의 폭력과 테러가 횡횡하는 사회,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폭력과 테러를 가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때 증오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약한 타자다. 가장 약한 타자를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하면 자기를 증오하고 공격하게 되며, 다른 이가 더 약한 자임을 확인하게 되면 그이에게 린치를 가한다. 때로 그런 피해자는 그를 둘러싼 이들의 집단공격을 당하곤 한다. 한편 공격할 타자를 밖에서 찾지 못하는 경우 가족 내에서 폭력이 가해지곤 하고, 심지어는 낯선 타자를 이유 없이 공격하는 이른바 ‘묻지마 테러’가 벌어지는 이유가 되기도 하며, 또 때로는 동물 학대 같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서바이벌 게임의 종언의 시대에 이르면 이런 현상은 더욱 극심해진다.
바로 이런 사회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세상과 마주하고 있다. 상처들이 넘쳐나고 분노와 증오가 남발되며, 서로가 서로를 경쟁자로 여기는 사회를 말이다. 이웃은 사라졌고 모두가 자신의 가상의 적인 사회를 우리는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1907년의 원기억은 전후의 상처들이 해소되는 해방의 체험으로 구성되었다. 그렇다면 그 기억의 계보에 선 이들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최근 주류 개신교의 신앙 행태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동성애 혐오주의자가 되거나 마초적 과잉 남성주의자가 되거나 극단의 반공주의자들처럼 이념적 분노와 공격성의 화신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타인의 상처를 주목하고 그것으로 인한 증후들의 배후가 되는 사회 체제를 비판적으로 해독하며, 해방의 체험을 일으키기 위해 기도하고 실천하는 자가 되는 것, 그 자리에 바로 평양 대부흥운동의 원기억의 계보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의 계보이며 바울의 계보이다. □
Posted by 망원올빼미
이 글은 한백교회 2013년 7월 21일의 하늘뜻나누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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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행정부
주님께서 이 언약을 우리 조상과 세우신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모두와 세우신 것입니다.
―「신명기」 5,3
지난 2008년, MB 정권이 집권한 첫해 제헌절은 법정 공휴일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국민들이 너무 많이 쉰다는 게 이유였지요. 아닌 게 아니라 한국은 세계 최고의 ‘과로사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헌절의 운명처럼 지난 5년은 정부가 주도하는 탈법과 불법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도 때도 없이 “법대로”를 외쳐댔던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첫 번째 제헌절이었던 지난 17일도 초라해진 법의 시간이었다는 점에서 예년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날도 국정원의 불법적인 정치개입을 비판하는 시민들의 거리시위와 시국선언이 잇달았지만, ‘법대로’ 대통령께서는 헌법수호를 재천명하는 입에 발린 성명하나 발표하지 않았지요.
흥미롭게도 그런 제헌절에 국회의장은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했군요. 무엇을 생각하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철저히 권력욕망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법을 개헌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물론 그들은 의미가 있다고 보았겠지만, 저는 무조건 반대입니다. 먼저 법수호의 의지를 보이지 않는 한, 입법부 수장이든 사법부 수장이든 대통령이든, 그런 말에 공명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한데 ‘법대로’가 허튼 말이 아닐 때도 있습니다. 지난 4월 5일 법무부와 안전행정부 업무보고를 받고 나서, 대통령이 ‘4대악 근절’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지요.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파괴범, 불량식품이 저 유명한 4대악의 정체입니다. 임기 중에 이것들을 반드시 뿌리 뽑아 국민의 안전한 삶을 지켜주겠다는 것입니다. 아하, 바로 이것이 정부조직개편에서 팻말, 명함 등을 바꾸는 데만 6천만 원이 든다는 안전행정부라는 명칭의 요체군요.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부부처는 향후 5년 동안 4대악 근절에 힘쓰겠군요. 그럼 권력형 범죄 문제는 좀 설설 다뤄도 된다는 것인가요?
지난 1998년 국민의정부 때에 총무처와 내무부를 합쳐서 행정자치부가 탄생했는데, 그것을 MB 정부는 행정안전부로, 박근혜 정부는 안전행정부로 개칭했습니다. 이 정부기관이 주로 담당하는 것은 사회통합입니다. 한데 명칭의 변화에서 추정되는 사실은 두 번의 개혁정부들은 이 부처를 통해 ‘지방자치’를 통한 사회통합을 중요시했다면, 두 번의 보수정부들은 ‘안전’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통합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박근혜 정부는 ‘안전’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 눈에 주목됩니다.
여기서 ‘안전’은 과거 독재정부들이 중요시했던 ‘공안’이라는 개념과 쌍을 이루는 용어입니다. 두 용어는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를 가정하면서 사회통합의 논리를 부여하는 개념입니다. 한데 공안이 이념적 위험을 제거하는 데 방점이 있다면, 안전은 일상적 범죄의 위험으로부터 사회를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물론 박근혜 정부는 여전히 공안 개념을 권력유지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NLL 논쟁 같은 ‘종북 담론’이 그런 예지요. 하지만 조작된 간첩단 사건으로 공안 담론을 가동시켰던 과거와는 달리 현재의 종북 담론은 보수-진보의 분할을 통한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그것은 결코 사회통합을 가능하게 하지 못합니다.
반면 안전의 개념은 사회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통치의 수단입니다.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동성폭력 범죄자인 김길태 사건이나, 강간 후 시신 유기사건인 오원춘 사건과 용인 여고생살인사건 등은 전 국민을 ‘증오의 연대’ 속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이때 매스미디어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은 의문의 여지없습니다. 무한경쟁 중인 매스미디어들에게 ‘공포’는 대중의 주목을 끌기에 더 없이 괜찮은 요소입니다. 그런 점에서 범죄 보도는 공포 마케팅에서 가장 쓸 만한 상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기사들은 그 범죄가 얼마나 잔혹한지, 그리고 그 범죄자들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죄의식이 없는 자인지를 강조하게 됩니다. 또한 그런 범죄들을 열거함으로써, 누구나 그런 범죄의 잠재적 희생자임을 체감하게 합니다. 하여 사람들은 증오와 공포심으로 그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한데 이런 매스미디어의 속성이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됩니다. 전 국민을 그 범죄의 적으로 만들고, 그 범죄자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키며, 그런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적대하는 사회적 연대를 구축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적개심을 행동화할 수 없습니다. 복수는 정부에 의해 독점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여 정부가 이 연대의 행위자가 되어 복수를 대행합니다.
복수는 가혹할수록 더 큰 쾌감을 줍니다. 하여 정부는 그 범죄자에게 법률상 가능한 한 최대의 중형을 내리게 합니다. 심지어 법이 국민의 감정에 못 미친다면 법을 개정하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부는 국민의 공포의 연대, 증오의 연대를 주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한데 이러한 증오의 연대를 통한 사회적 통합은 많은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범죄를 왜곡 과장함으로써 범죄자의 인권을 유린할 수 있고, 둘째, 그런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이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문제를 낳습니다. 이때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되는 이들은 대개 사회적 소수자들이지요. 즉 소수자에 대한 시민사회의 증오범죄를 야기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회복지나 경제민주화 정책 같은 사회적 양극화를 완화시키는 정치를 정부가 후퇴시킬 때 시민사회의 저항을 희석시키는 효과를 발휘할 우려가 있습니다.
그런 통치 수단을 활용하는 정부는 ‘안전’이라는 명분 아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해 가혹한 법치를 수행합니다. 반면, 경제적, 정치적 권력이 불러일으키는 불법과 탈법에 대해서는 솜방망이로 법을 활용하곤 합니다. 연이어 집권한 한국의 보수정부들은 행정안전부 혹은 안전행정부를 통해 그런 식의 사회적 통합이 실현되는 사회를 구축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65주년 제헌절이 소외되고 있는 오늘 한국의 법적 현실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 유다국에서 처음 반포된 법의 현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요시아 정부는 증조부인 아하스 왕이 이룩한 발전의 토대를 재구축하고자 법의 반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조부인 히스기야 왕의 정치를 계승하는 것이었지요.
아하스 왕은 약소국 유다를 강대국으로 일으켜 세운 통치자입니다. 하지만 이때는 유다국의 보수기득권 세력이 형성되는 시기이기도 했지요. 하여 소농은 몰락하고 있었고, 기득권층은 크게 강화된 부와 권력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런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통치자였지요.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부당한 권력의 횡포를 제약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패했고, 그의 아들 므낫세의 기나긴 통치 아래서 개혁의 기반은 철저히 무너졌지요.
한데 므낫세를 이어 왕이 된 요시아는 다시 히스기야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통치는 법의 반포를 통해 시행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명기」 법전입니다. 하지만 그 법은 글을 읽지 못하는 대중에게는 무용지물입니다. 그런 법은 왕실과 귀족 사이에서나 작동하는 법이지요. 그런데 왕은 백성들을 법의 질서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즉 법전의 길고 복잡한 내용을 간소하게 하여, 백성에게 법을 선사한 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그는 그런 식으로 사회를 통합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하여 요시아가 제정한 고대 유다국의 법은 안전을 강조하면서 특정 범죄자를 증오하게 하는 법이 아닙니다. 그 법은 백성과 소통하는 법이고, 백성을 법 밖의 대상으로 전락시키지 못하도록, 그들이 법의 백성이 되고 법의 혜택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그런 법이었습니다. 그 법은 권력층의 힘이 남용되는 것을 억제하고 그것이 백성을 몰락하게 하여 법의 밖으로 내몰게 하는 것을 막아내고자 하는 법이었던 것입니다.
제헌절 65주기를 맞이한 오늘 우리의 법 현실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정부는 공공연히 안전을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하여 공포 마케팅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공포를 통한 사회적 통합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증오로 구축되는 병든 시민의 사회입니다. 또한 그것은 사회복지나 경제민주화를 향한 느릿느릿하고 비틀거리는 시도나마 폐기해도 시민적 저항이 없는 무능력한 사회가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지금 많은 시민은 저항중입니다. 부당한 권력을 직시하고 있고, 안전 욕구에 매몰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요시아의 법 정신처럼 이웃과 공공적인 것을 나누고, 배제된 소수자에 대한 특별한 배려를 간직한 시민성이 되살아나는 계기가 된다면 제헌절은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는 유다국의 보수기득권 세력이 형성되는 시기이기도 했지요. 하여 소농은 몰락하고 있었고, 기득권층은 크게 강화된 부와 권력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런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통치자였지요.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부당한 권력의 횡포를 제약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패했고, 그의 아들 므낫세의 기나긴 통치 아래서 개혁의 기반은 철저히 무너졌지요.
한데 므낫세를 이어 왕이 된 요시아는 다시 히스기야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통치는 법의 반포를 통해 시행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명기」 법전입니다. 하지만 그 법은 글을 읽지 못하는 대중에게는 무용지물입니다. 그런 법은 왕실과 귀족 사이에서나 작동하는 법이지요. 그런데 왕은 백성들을 법의 질서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즉 법전의 길고 복잡한 내용을 간소하게 하여, 백성에게 법을 선사한 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그는 그런 식으로 사회를 통합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하여 요시아가 제정한 고대 유다국의 법은 안전을 강조하면서 특정 범죄자를 증오하게 하는 법이 아닙니다. 그 법은 백성과 소통하는 법이고, 백성을 법 밖의 대상으로 전락시키지 못하도록, 그들이 법의 백성이 되고 법의 혜택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그런 법이었습니다. 그 법은 권력층의 힘이 남용되는 것을 억제하고 그것이 백성을 몰락하게 하여 법의 밖으로 내몰게 하는 것을 막아내고자 하는 법이었던 것입니다.
제헌절 65주기를 맞이한 오늘 우리의 법 현실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정부는 공공연히 안전을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하여 공포 마케팅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공포를 통한 사회적 통합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증오로 구축되는 병든 시민의 사회입니다. 또한 그것은 사회복지나 경제민주화를 향한 느릿느릿하고 비틀거리는 시도나마 폐기해도 시민적 저항이 없는 무능력한 사회가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지금 많은 시민은 저항중입니다. 부당한 권력을 직시하고 있고, 안전 욕구에 매몰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요시아의 법 정신처럼 이웃과 공공적인 것을 나누고, 배제된 소수자에 대한 특별한 배려를 간직한 시민성이 되살아나는 계기가 된다면 제헌절은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올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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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원올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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